신년칼럼

[2005년] 희망 공부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많이 지으시기 바랍니다

창비를 아껴주시는 웹진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05년 새해에도 복을 많이 받으시고 많이 지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 신년인사를 드릴 때마다 나의 주제는 ‘희망’이었습니다. 2002년 초에는 ‘밝아올 세상, 밝아진 한반도’를 말했지요. 그런데 2001년 연말의 분위기가 밝음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기에 다소 파격적인 발언으로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2002년이 진행되면서 월드컵을 멋지게 치렀고 후반기에는 여중생 사망에 항의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외치는 촛불시위가 전국을 밝혔으며, 드디어는 변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이 몸을 던져 후원한 대통령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밝아진 한반도’를 한껏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실감을 딛고 2003년 새해에는 「희망의 승리를 이어가자」라는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 해가 저물어갈 무렵에는 다시 혼란과 불안이 주조를 이루는 듯싶었습니다. 그 어수선함이 2004년의 대통령탄핵 파동으로 이어졌는데, 다행히도 이것이 또 한번의 반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창비로서는 2003년이 최초로 내 집 마련을 하고 회사 이름을 ‘창비’로 바꾸는 등 여러모로 획기적인 해였기에 2004년의 신년사에는 이에 대한 소회와 다짐을 담았습니다. 그러면서 특히 공부와 자력기르기를 주제로 삼았지요.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공부라고 하면 거의 전적으로 학교 공부, 그 중에서도 시험점수 잘 받는 공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쿵후'(工夫)로도 읽히는 그 한자표기에서도 짐작되듯이 공부는 온몸으로 하는 것이요, 인생살이와 일거리 하나하나가 공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공부한다는 것은 곧 희망함이며 희망한다는 것은 곧 공부하고 일함을 뜻합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곧 공부하고 일함을 뜻합니다

여러해 전의 일이지만 나는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83)을 읽으면서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는 그의 ‘낙서’ 한 대목에 이르러 눈이 번쩍 뜨인 적이 있습니다. 동료 노동자들을 조직해보려 해도 잘 안 되는 좌절감을 표현한 것인데, 그들의 나약함이나 비겁함을 나무라기보다 ‘희망함이 적다’는 약점을 짚어낸 데서 전태일의 비범성이 새삼 드러난 것입니다. 그의 분신이 결코 절망과 악에 받친 자해(自害)가 아니라 소신불공(燒身佛供)의 보살행(菩薩行)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지요.

그러고 보면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만이 아닙니다. 복권당첨을 바라는 식의 안일한 기대나 일기예보 하듯이 방관자의 입장에서 내일을 낙관 또는 비관하는 태도가 모두 참된 희망에 어긋납니다. 이런 그릇된 희망하기를 차단하는 절망이라면 그것이 오히려 희망 공부, 희망=공부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2004년말 2005년초의 세상 역시 어둠이 짙은 느낌입니다. 지진과 해일로 인한 엄청난 인명손실은 천재지변이라 치더라도, 밖으로는 이라크에서의 살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일방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며, 안으로는 나라경제 특히 서민들의 살림이 너무나 어려워서 끔찍한 일들이 잇달아 벌어지곤 합니다. 굶어 죽고 불타 죽는 어린이, 부모들 손에 ‘동반자살’을 당하는 어린이 들마저 속출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자문하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과연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무거운 마음으로 묻는 것 또한 희망 공부의 일부입니다.

그 해답이 간단히 나올 리야 없지요. 다만 제대로 된 답에는 한국사회 안에서만이라도 우리가 조금 더 보살피고 나누는 삶을 산다면 이러저러한 불행을 피해갈 수 있으리라는 ‘작은 이야기’와, 현대세계의 구조와 인류사회의 원리가 어떻게 바뀌어야 사람들이 전쟁과 빈곤에서 벗어날지에 대한 ‘큰 이야기’가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 또한 희망 공부입니다

실제로 시야를 조금 넓히면 초강대국의 오만한 질주나 이라크 민중의 안타까운 희생이 모두 암담한 소식만은 아닙니다. 강자가 약자를 도와주는 대신에 억누르는 세상, 빈부의 격차를 그 작동원리로 삼는 세계질서가 이제 더는 그럴싸한 겉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서 ‘막 가는’ 작태를 표면화하게 된 것이니까요.
이런 싸움에 우리가 점령군의 편에 동원된 것은 큰 치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군이 있든 없든 이라크가 미국의 뜻대로 평정되지는 않을 것이며, ‘막가파’식 작태는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든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치욕도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치욕으로 깊이 느끼기만 한다면, 좀더 떳떳한 앞날을 위한 뼈저린 공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지구적인 혼란도 그렇습니다. 이 세계체제가 인류에게 평화와 안녕을 약속한다는 거짓 희망을 잠재우고 새 길을 찾게 만든다는 점에서 공부의 기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하대란(天下大亂)의 시대에 그나마 우리가 속한 동아시아와 동북아시아가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여러 가능성을 안은 지역이라는 것이 저의 지론이기도 하지요.

그중 한반도만은 당장에 북핵문제로 전쟁의 위협마저 감돌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미국의 일방주의가 한반도에서는 그 위세가 다소 꺾인 느낌이고, 6·15 공동선언 5주년을 맞는 2005년에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개가 기대됩니다.

남쪽 사회 내부의 온갖 혼란도 우리가 지닌 역동성의 다른 일면이랄 수 있습니다. 분단체제가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일부 소수에게는 달콤한 특권을 선사했고 상당수에게 이 정도의 안정이나마 지속되리라는 거짓 희망을 안겨왔는데, 이제 그 분단체제가 흔들리면서 우리가 새로운 공부로 내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인식이 얼마나 타당하며, 타당하다고 할 때 어떤 대응이 필요한가를 두고는 우리 모두가 정말 열심히 토론하고 공부해야겠지요. 창비는 계간지와 여타 출판물을 통해, 그리고 희망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이 공부에 기여할 것을 약속합니다.

문학을 고수하는 것 자체가 희망의 이행입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런 세월에 문학을 고수하는 것 자체가 희망의 이행입니다.
흔히들 문학은 굶는 사람에게 밥 한 덩이 줄 수 없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입혀주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당장에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밥 한 덩이가 최고의 시편보다 아쉽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요.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는 힘이 실제로 문학에 있다는 사실을 어찌 부정하겠습니까. 다만 그것은 읽어주는 사람들의 성정(性情)에 작용함으로써 전파되는 힘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얼마만큼 행사되는지 계량할 수 없을 따름이지요.

이처럼 계량이 없는 가운데 희망을 품고 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물론 중생과 인류의 고통에 아랑곳없이 자기탐닉으로 문학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요. 그러나 제중(濟衆)의 큰 뜻에 공감하면서, 누가 어떻게 읽어서 언제 어떤 실행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글을 세상에 내놓는 일은 희망함이 작아서는 버텨낼 수 없는 일입니다.

새해에는 문학에도 더 많은 애정을 베풀어주시고 좋은 문학과 덜 좋은 문학, 아예 안 좋은 문학을 가리는 데 일조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을 빌며,

2005년 새해 아침에 백낙청 드림

 

(창비 웹매거진 20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