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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의 현단계』 개정판을 내면서

첫 저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978)을 내고 두번째 문학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를 낸 것이 1985년이다. 그사이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1979)라는 저서가 하나 더 있었지만 그 책은 문학평론 몇편과 1990년대라면 ‘사회비평’에 해당하는 글을 따로 묶는 저서에 들어갈 내용이 섞여 있었다.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는 절판된 지 한참 되었다. 그사이 찾는 독자들이 없지 않았으나 활판인쇄용 지형이 쓸모가 없어진지라 중쇄가 불가능했다. 이번에 창비사에서 이 제2집과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3’이라는 부제가 달린 『민족문학의 새 단계』(1990)를 새로 조판해서 간행해주겠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새로 내는 김에 2집의 제목을 ‘민족문학의 현단계’로 바꾸었고 원제는 부제로 돌렸다. 표제작은 1975년에 처음 발표되어 의당 첫 평론집에 들어갔어야 하지만 그것을 (김지하 시편들과 함께) 실은 『창작과비평』 1975년 봄호가 강제회수를 당했던 터라 유신 말기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평론집 수록을 자제했던 것이다. 따라서 1980년대 전반기의 글을 주로 담은 평론집의 표제작으로 안 어울리는 면도 있지만 책제목으로 ‘민족문학의 현단계’가 적절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한가지 이유는, 우리 문학의 고비마다 지금 우리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를 묻는 작업이 문학비평의 중요 과제라는 믿음을 나는 일관되게 견지해왔는데, 제3집 첫머리의 「민중·민족문학의 새 단계」에서 말했듯이 “역사학에서 시대구분의 문제가 어떤 의미로 구체적 역사이해의 관건이 되듯이, 우리가 사는 시대 속에서 다시 몇개의 단계를 가르고 이를 세분화한 ‘국면’과의 차이를 식별하려는 노력은 현재를 역사로서 이해하여 대처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민족문학의 새 단계』 21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학의 경우는 먼 옛날의 문학사를 쓰더라도 아직도 살아 있는 작품들이 1차자료라는 점에서, 비평작업과 문학사 연구가 전혀 별개의 작업일 수 없고 ‘현단계’의 성격을 묻는 비평적 노력은 역사로서의 현재와 그 현재의 문학을 만들어가는 작업의 일환인 것이다.

다른 한가지 이유는 그러한 작업을 위해 써낸 「민족문학의 현단계」 이래의 평문들이 그 나름으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비평의 새로운 작은 갈래를 개발하는 시도였다는 점이다. 곧, 언로가 극도로 막힌 시국에 그나마 문학평론의 형태로 숨통을 틀 수 있었던 정세론·시국론과, 구체적인 작품들에 대한 평가, 그리고 문학 및 시대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 성찰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에세이로서의 비평을 쓰고자 한 것이다. 당시의 글들이 지금 보면 시대적 한계도 있고 나 자신의 개인적 한계도 뚜렷하지만, 적어도 작품론에 앞서 그 방법을 미리 정해주는 (주로 외국의) 이론을 길게 소개하며 시작하는 근년에 부쩍 흔해진 비평과는 다른 성격이었다. 이런 자기평가에 독자들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기다려볼 뿐이다.

새 정권이 들어서는 2022년의 상황은 본서가 태어난 시대와 여러모로 너무나 다르지만 뜻밖의 유사성도 눈에 띈다. 정부가 ‘공정과 상식’을 외쳐대는 모습이 80년대 초 정권이 ‘정의구현’을 부르짖던 것을 연상치 않을 수 없게 만드는가 하면, 유독 그 무렵 많이 나왔던 ‘화해’ 이야기는 ‘협치’와 ‘국민통합’에 대한 약속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전두환정권 초기에 쓴 「민족문학의 새로운 고비를 맞아」(1983) 마지막 토막 ‘화해에 대하여’에서 나는 화해에 대한 목마름이 “80년대의 개막을 알린 격동과 낭자한 유혈에 이은 당연한 반응”이지만 “그러나 화해가 어디 입으로 외쳐댄다고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물건이란 말인가!”라고 다소 ‘삐딱한’ 태도로 나왔다. 오늘도 분단의 족쇄와 부패 카르텔의 존재를 그대로 둔 채 ‘국민통합’을 약속하는 것은 여전히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이 문학평론집으로는 예외적이랄 만큼 많이 보급된 데 비해 2집에 대한 반응은 현저히 떨어졌다. 광주학살을 겪은 198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는 완연히 달라져 젊은이들이 문학평론을 통한 시국담이나 문학 자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떨어진데다, 문단 내에서 나는 상당수 후배 평론가들로부터 ‘소시민적 민족문학론자’로 낙인찍히고 파상공세에 시달리면서 독자들로부터 외면의 대상이 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일일이 반론을 하며 잘 버텼다!) 그런 상황에서 500면에 가까운 두툼한 책을 안기면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라는 싱거운 제목을 달았으니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가 더욱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될 거라는 편집부 내의 경고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고집대로 밀고 나간 것은 일종의 오만이었다는 비판도 들을 법하다.

어쨌든 이번에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반성되는 바 있었다. 책을 써서 내놓는 것은 자식을 낳아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에 비교할 만하다. 자식이든 저서든 그때부터 독자적인 삶을 시작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을 낳아놓기만 하고 전혀 뒷바라지를 않는다면 그 또한 무책임한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먹고살기가 너무 바빠서 자식을 돌볼 여지가 없는 부모들이 세상에는 많고, 어떤 의미로 나도 그런 부모의 처지와 완전히 다르지는 않은 날들을 살았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적빈에 시달리지도 않으면서 내 책은 이미 내 손을 떠났으니 알아서 읽든 말든 하시오 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태도였을까. 더구나 내가 자부했듯이 나의 글들이 ‘역사로서의 현재’에 대한 의미 있는 개입이었다면 말이다.

지금 와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단지 과거를 반성하는 뜻만이 아니다. 세상에 나온 지 40년 안팎이 된 글들이라도 아직 세상에 쓸모가 남았다면, 뒤늦게나마 독자들의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십사는 호소라도 간곡히 보태고 싶기 때문이다.

개정판을 내면서 오타나 오류를 바로잡고 일부 윤문을 더했지만 거의 초판 그대로라 할 수 있다. 다만 초판 제2부의 「미국의 꿈과 미국문학의 짐」은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창비 2020) 제9장으로 새로 손질한 내용이 나갔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제외했다. 『세계의 문학』에 실린 초출본(1982)과 본서 초판의 수정본, 그리고 이번 개정판의 재수정본을 비교하는 것이 연구자에게 무의미한 일은 아니겠지만, 초판보다 글자 크기를 키우다보니 면수가 더 늘어나는 사태를 조금이라도 억제해보려는 생각이었다.

 

교정은 정편집실의 김정혜 실장이 맡아서 꼼꼼히 챙겨주었고 창비사 문학출판부의 전성이 차장과 박지영 과장을 비롯한 실무진도 노고가 컸다. 두루 감사드린다. 판매 전망이 불투명한 책이 계속 유통될 수 있도록 결정해준 강일우 대표와 창비사에도 특별한 고마움을 표한다.

 

2022년 5월
백낙청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