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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1권 해설

민족문학론의 우렁찬 발걸음: 백낙청 비평역정의 초창기 풍경

염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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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여년에 걸친 백낙청 선생의 활동과 업적은 이제 부연설명의 필요가 없는 공공연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하려 들면 그는 종래의 일반적인 개념에 간단히 포획되지 않는다. 그가 1960년대 중반에 영문학 교수이자 문학평론가로 공적 활동을 개시한 것은 잘 알려져 있고, 곧이어서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하여 지금까지 이 잡지를 주도해온 것도 공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윤곽 내지 일종의 표지판일 뿐, 그 윤곽 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고 표지판을 따라가서 무엇을 마주치게 될지는 자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 대학에서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과 문단현장에서 평론활동을 하는 일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기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수가 많다. 학벌사회 특유의 엉뚱한 부작용이 더러 나타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론적 연구와 실제비평이 한 사람의 작업영역 안에서 맞물려 이루어지는 것은 양자 모두의 내실있는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만 하더라도 대학교수가 신문이나 잡지에 비평적인 글을 발표하는 것을 일종의 외도로 여겨 백안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헌구·백철·조연현·곽종원 등 당시의 이른바 대가급 평론가들이 모두 대학에 문학교수로 자리잡고 있었으나, 그들의 학자·평론가 겸업은 사실상 편의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일제 말 최재서(崔載瑞)가 강단비평이란 험담을 들어가면서도 잠시나마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의 통합의 예를 보여주었고, 이와는 아주 다른 경우이지만 고전연구가인 김태준(金台俊)과 현장활동가인 임화(林和)가 출판사 학예사(學藝社)를 무대로 일정한 이념적 결합을 이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맹아적 시도마저도 일제 말의 억압적 상황과 해방 후의 남북분단 과정을 거치는 동안 자취를 감추거나 기형적으로 왜곡되고 말았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아직 어설프기 짝이 없던 우리 대학제도 안에서의 명색 문학연구 및 문학교육이 그 나름으로 치열했던 동시대의 문학현장을 이론적으로 감당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면 4·19혁명을 겪고 난 1960년대 중반은 한국사 전체에서 그러하듯 문학사에서도 중대한 전환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시기에 이르러 한국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 ‘근대화’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새로운 국가발전 방향을 모색했는바, 그 결과 이 나라는 이 무렵부터 질적으로 다른 사회로, 즉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근대적인 산업사회로 급격하게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난 수십년 동안의 생생한 경험이 말해 주듯이 우리는 엄청난 물량적 발전과 유례없는 사회적 변화의 시대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변화·발전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에 의해, 농민·노동자 등 기층민중의 광범한 희생을 기반으로, 그리고 외국자본의 도입과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추진된 것이었으므로 내부적으로 허다한 모순과 문제점을 양성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근대화’ 초기부터 대학생·지식인 등을 전위로 하는 비판세력과 군사정권 사이에는 사사건건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졌고, 이 충돌은 69년의 삼선개헌, 71년의 대통령선거, 72년의 10월유신 같은 정치적 사변을 거치면서 점점 더 뚜렷한 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문학사적으로 볼 때 60년대 중반은 좁은 의미에서 전후문학(戰後文學)이 마감되는 싯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전후문학이란 용어도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4·19 직후 일단의 젊은 문인들이 ‘전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그동안의 문단 기득권층이 주도해온 문인협회 중심의 어용적인 풍토에 반기를 들고자 했던 것을 보면, 이들의 ‘전후문학’이란 개념 안에는 이승만정권의 50년대적 현실 및 그 시대의 주류문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도전 대상이었던 당대의 주류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이 자리에서 길게 논의할 여유는 없지만, 해방 후 좌우익 간의 치열한 이념투쟁과 6·25전쟁의 참화를 거치는 동안 한국문단에서는 진보적 역사관 내지 비판적 사회의식을 가진 문학이 싹쓸이되다시피 사라지고 김광섭·모윤숙·이헌구 등 보수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문인들과 김동리·서정주·조연현 등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순수문학 주창자들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장악했다. 1955년 예술원 발족과 『현대문학』창간을 계기로 그 양파 간에도 오랫동안 헤게모니 쟁탈전이 전개되지만, 사실상 그것은 문학이념과 상관이 없는 이권다툼에 불과했다. 요컨대 당시의 주류문학이란 기성체제에 비판적이기보다 순응적이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현실의 문제들을 외면하려는 문학이며, 외국의 유행사조를 추종하는 데 급급하여 그것을 주체적으로 소화할 자세도 능력도 갖추지 못한 문학이었다. 과거를 미화하는 복고주의적 태도와 서구문학에 대한 일방적 추종주의는 일견 상반된 지향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당면한 현실에 적극적 주체적으로 부딪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자신의 현재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 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시기에 기성세대의 이러한 현실타협적인 문학만 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손창섭·장용학·이범선·선우휘·오상원, 김수영·신동문·전봉건, 이철범·홍사중·이어령 등 전쟁의 포연 속에서 젊음을 보낸 세대의 절망의 심연에서 솟아오른 문학, 현장의 증언이 생생하게 담긴 저항의 문학이 전후의 폐허 같은 문단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전후문학’이라는 말로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학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황순원(黃順元)은 이들보다 선배세대이지만 그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는 전형적인 전후문학이라 할 수 있으며, 반면에 구자운(具滋雲)은 전후문학가협회 간사를 맡았음에도 그의 시에 어떤 전후문학적 특징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가 하면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지니고 그 아픔의 근원을 천착하는 데 문학적 생애를 바치는 이호철·김원일·이문열의 작품세계를 전후문학이라 명명하는 것은 개념의 지나친 확대임이 분명하다. 어떻든 전후문학이란 용어는 좀더 한정적인 개념으로, 즉 휴전 이후 10여년 동안의 독특한 시대적 상황에 결부된 특정한 문학세계를 가리키는 역사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의 전후문학은 50년대 주류문학의 근본적인 허점 즉 비주체적이고 체제순응적이며 몰역사적인 성향을 비추는 거울 노릇을 하기는 했으나, 그 허점을 본격적으로 의식화하여 극복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따라서 4·19혁명이 열어놓은 공간에서 활발하게 벌어진 60년대의 소위 참여문학 논쟁은 50년대 전후문학의 무의식적 문제제기가 70년대 이후의 민족문학론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이론적인 통과의례로서의 필수적인 중간단계였다고 생각한다.
 

2

이상의 간략한 서술을 통해 나는 백낙청 비평의 출발지점이 해방 후 한국문학사의 결정적 전환기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셈이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평론가로 데뷔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며, 예컨대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그러나 백선생의 경우 그의 비평활동과 시대적 배경 사이에 유달리 긴밀한 연관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취할 수 있다. 아마 그만큼 자기 시대의 구체적인 현실을 끊임없이 민족사의 커다란 맥락 안에서 통찰하여, 그때그때의 현실이 요구하는 이론적 필요에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과 사색을 투입한 예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가 발표한 주요 평론들-물론 이것은 그의 저작의 일부이다-의 표제가 「민족문학의 현단계」(1975) 「민족문학론의 새로운 과제」(1980) 「민족문학의 새로운 고비를 맞아」(1983) 「오늘의 민족문학과 민족운동」(1988) 「지구시대의 민족문학」(1993) 「분단시대의 최근 정세와 분단체제론」(1994) 등인 것만 훑어보아도 그가 늘 긴장된 역사감각과 일관된 사명의식을 가지고 당면한 현실과의 연관 속에서 당대문학의 성취와 과제를 점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글과 말은 언제나 시대적 상황에 밀착되어 있고, 또 그런 뜻에서 그의 글과 말은 그야말로 시대의 소산이다. 따라서 그를 이해하자면 다른 누구의 경우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가 살아온 시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의 글과 말의 뿌리에, 즉 그의 사색의 바탕에 강력한 현실성이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지 그의 글과 말이 시대의 표면을 외면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그의 사색은 굳어진 관습과 피상적인 유행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요소를 늘 함축하며, 따라서 흔히 말하는 전복적이고 논쟁유발적인 성격이 그의 글과 말에 늘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초기 비평에 상투형의 파괴, 상투형과의 싸움이라는 주제가 그처럼 자주 중요한 화두로 대두되었던 것도 이런 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초기’라고 하는 것은 1965년 문단등장부터 1969년 다시 도미하기까지, 즉 『창작과비평』 창간호의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부터 「시민문학론」까지를 가리키는데, 말하자면 이 시기는 백낙청 비평의 요람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의 평론들을 다시 읽고 나서 말해야 책임있는 발언이 되겠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형편상 도저히 그럴 수 없어 대강의 짐작으로 말한다면, 그의 초기 비평에는 7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집중도로써 전개되어온 이념적 모색과 실천적 자세가 이미 맹아적으로 잠재해 있는 듯하다. 물론 초기의 글에는, 『창작과비평』 10년을 돌아보는 좌담에서 스스로 인정했듯이, 우리 현실에 발딛는 자세가 아직 확고하지 못하고, 설사 현실인식을 강조하더라도 그것을 바로 민족현실이라는 말로 개념화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며, 무엇보다 여러 면에서 외래지향적 취향이랄 수 있는 측면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서양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의 체취가 어쩔 수 없이 풍긴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런 측면 자체는 자랑이 아니다. 그러나 백낙청의 인생역정 전체에서 볼 때에는 초기의 그런 요소야말로 오히려 귀중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당시 우리 문학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인 현실성의 회복과 외래지향성의 극복이 그 개인에게는 동시에 자신의 절실한 내적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수도자와도 같은 성실함과 철저성으로 휴식 없는 자기확장의 길을 걸어간 것은 동시대를 함께 산 우리 모두에게 복된 일이다. 이번에 3,40년 전의 대담과 좌담들을 읽고 나는 새삼 그 점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대담·좌담·인터뷰 등을 모은 것으로는 이 다섯 권의 『백낙청 회화록』은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 초유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그동안 그가 꼼꼼하고 빈틈없는 문장으로 구축해온 비평의 세계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면서도 형식상 구별되는, 또 하나의 커다란 지적 영토를 일구어왔음을 발견하고 경탄하게 된다. 동시에 이 도도한 담론의 항해는, 백선생이 조타수(操舵手)로서 전체적인 방향을 잡고 나아가기는 했지만, 여러 분야에서 그때그때 차출된 많은 선원들의 적극적인 협동 없이는 성사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드물게 집단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한국 현대의 지성사(知性史)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울러 다섯 권의 목차만 보더라도 그의 사상적 심화와 활동영역의 확대를 한눈에 개관할 수 있는데, 뒤로 갈수록 신문이나 방송과의 인터뷰가 잦아지고 있어, 그의 지도적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치가 높아짐을 짐작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말은 글로 쓰는 것이든 입으로 내뱉는 것이든 누군가 읽거나 들어줄 상대를 향해서 하는 발화의 형식이다. 잘 알고 있듯이 글은 집필-발표-독서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매단계 특유의 제약과 장점을 아울러 지니게 마련이다. 어떻든 지식의 생산과 유통, 보존에 있어 글(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그런데 강연·강의, 대담·좌담, 각종 토론, 인터뷰 등은 그 공공성에 있어서 우리의 일상적 언어생활과 다르고 동시에 음성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글과도 구별된다. 써놓은 원고를 읽는 강연이라 해도 그 자리의 청중에게 직접 소리로 전달된다는 현장성·일회성을 전제로 하며, 더욱이 대담이나 좌담의 경우 서로 다른 입장과 견해를 가진 참석자들 간에 교환되는 주장과 반론은 불가피하게 현장성과 즉흥성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회화록은 백선생이 훌륭한 문장가임에 못지않게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임을 입증하는데, 특히 70년대 중반 ‘백낙청 민족문학론’의 이론적 얼개가 형성되어갈 무렵에는 유난히 그의 어조가 치열하고 논리가 전투적이어서, 다른 어느 시기의 좌담보다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3

이 책에서 백선생이 처음 참석한 좌담은 「작가 선우휘와 마주 앉다」(1968)라는 대담이다. 애초에 잡지사에서 붙인 제목은 ‘작가와 평론가의 대결’인데, 제목의 선정성으로 보나 대담이 이루어진 싯점으로 보나 부제인 ‘문학의 현실참여를 중심으로’가 더 중요할 것이다. 이 부제가 말해주듯 대담은 60년대 내내 문단을 달구었던 참여문학 논쟁의 와중에서 이루어졌고, 실상 이 대담 자체가 그 논쟁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그 전해 한 쎄미나(1967. 11.)에서 불문학자 김붕구(金鵬九) 교수가 「작가와 사회」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의 참여문학론자들이 서구문학 사조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주체성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싸르트르식 참여론을 추종하는 것은 결국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데올로기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이를 계기로 김교수의 주장을 찬동·반박하는 글들이 여러 신문-잡지에 발표되어 참여문학 논쟁은 해방공간의 좌우투쟁을 연상케 하는 위험수위까지 고조되었는데, 그러한 김붕구의 주장을 속화된 언어로 재탕한 것이 선우휘였다. 「분지(糞地)」사건(1965)과 관련하여 소설가 남정현(南廷賢)의 구속에 항의하는 글을 발표하고 이로 인해 당국에 연행되는 것으로 문단 이력을 시작한 백선생이 선우휘와의 대담에서 왜 그처럼 방어적인 자세로 시종했는지 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적 배경을 상기할 때 제대로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방어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이 대담은 백낙청 비평의 한두 가지 기본전제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발언이 그러하다. “한국 지식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저는 우선 싸르트르가 문학의 본질이 자유이며 도구가 아니고 바로 그런 속성 때문에 문학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현실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밝혀준다는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의 ‘현실’을 선생님(선우휘-인용자)은 편의상 이남과 이북으로 갈라서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죠. 한국 바깥의 세계라는 것도 ‘한국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고요”(본서 13, 29면) 어떤 점에서 이 발언에 담긴 문학관과 세계적 관점은 더욱 발전된 형태로 오늘까지 견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담에서 나를 특히 괄목케 하는 것은 그가 선우휘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반박하기보다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도리어 상대방의 냉전논리를 해체하는 논쟁의 기술을 발휘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백낙청 문학비평의 본격적 전개는 미국에서 돌아와 문단에 복귀한 1973년부터일 것이다. 이 해에 그는 신경림(申庚林)의 첫시집 『농무』에 발문을 썼고 이어서 김종길·김우창과 함께 「시집『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이라는 좌담에 참석했다. 이 좌담은 3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 읽어도 신경림 시의 문학사적 의의에 대한 낡지 않은 관찰들을 담고 있다. 이 무렵부터 20년 동안 백선생의 비평적 사유는 한마디로 민족문학론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리 들어가는 초입에 신경림 시의 발견이 놓여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좌담에서도 그는 김수영·신동엽과 비교하여 신경림 시에서 성취된 민중성과 현대성의 독특한 결합을 지적하고 있지만, 예술성과 운동성의 결합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할 수 있는 이런 측면이야말로 평론 「민족문학 이념의 신전개」(1974), 대담 「리얼리즘과 민족문학」(1974), 평론 「민족문학의 현단계」(1975), 좌담 「어떻게 할 것인가-민족·세계·문학」(1976) 등을 통해 본격화되는 민족문학론의 주요 골격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한국 참여론자들의 싸르트르 추종에 대한 선우휘의 비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되 그것을 외국문학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일반명제로 승급시킨다든가 한반도의 분단된 양쪽뿐 아니라 한국 바깥의 세계도 한국현실의 일부를 이룬다고 발언하는 데서 나타나는 개방적이면서도 세계적인 관점은 그의 민족문학론의 또다른 구성부분이다. 주로 리얼리즘 논의와 연관된 발언 속에서 그는 보기에 따라 아주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우리가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꼭 어떤 시대, 어떤 부류의 사실주의적인 문학에 구애됨이 없이 우리의 입장에서 새로 이해하고 살려나가려고 한다면 이제는 서구문학의 테두리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이 19세기 서구 대가들에 대한 재평가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리얼리즘과 민족문학」, 본서 107면) 이런 생각은 때로는 문학론의 범위를 넘어 현 세계질서의 정당성에 대한 근원적 의문으로 발전한다. “약육강식의 세계질서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민족의 경우에는 (…) 이러한 부당한 질서에 대해 자기방어를 해야겠다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출발해서 이것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질서가 이루어져야겠다는 생각에까지 나갈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어떻게 할 것인가」, 본서 229면) 제3세계 문학의 일원으로서의 한국 민족문학의 세계사적 의의와 남다른 사명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나온 이 발언은 아마 백낙청 사유의 전개과정에서도 가장 급진적이고 근본주의적인 대목일 것이다.
 

4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백선생은 1987년 6월항쟁을 겪고 난 다음부터 분단현실의 구조적·역사적 이해에 몰두하여 이를 분단체체론으로 정식화한 바 있다. 잘 알고 있듯이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오늘날 분단극복을 위한 국민적 실천운동의 최전선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고, 그런 활동을 통해 그의 분단체제론은 이제 이론의 영역을 넘어 현실을 변화시키는 물질적 힘의 영역으로까지 진입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의 경우 적어도 분단문제에 대한 사유가 결코 돌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연원을 가진 것이며, 그의 분단체제론이 면밀하고 점진적인 준비과정의 생성물이라는 점이다.

이번 책에서 보더라도 이미 그는 1976년 『세계의 문학』 창간호 좌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중대하고도 험난한 작업임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민족 대다수가 통일이라는 명제 앞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느끼는 절실한 감정을 존중한다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인 당위의 문제도 아니요 (…)”(「어떻게 할 것인가」, 본서 237면) 이듬해인 1977년 『독서신문』 주최의 좌담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한민족의 이상」에서는 이렇게 발언한다. “통일을 지향하면서 통일을 저해하는 문제를 하나하나 생각하고 이것을 해결해나가려고 하는 노력과 세계 전체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기를 지향하는 노력 간에 어떤 구조적·본질적인 일치점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본서 271면) 물론 이만한 정도의 발언에 과도한 무게를 둘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적어도 좌담 「분단시대의 민족문화」(1977)까지만 하더라도 분단문제에 관한 이론적 주도권은 ‘분단시대’라는 용어의 창시자인 강만길(姜萬吉) 교수에게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의 문학운동은 10·26과 5·18이라는 결정적 고비를 맞아 일시적인 위축기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이어진 폭발과 분출의 장관(壯觀) 또한 어느덧 역사 속의 페이지로 옮겨지고 있다. 백낙청의 이름과 불가분하게 연결된 민족문학론은 당연히 이 7,80년대의 격변을 온몸으로 통과했다. 그리하여 21세기를 맞은 오늘 마침내 세상은 달라져 남북분단의 벽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긍정적 변화의 조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생활을 얽어매고 있는 모순의 그물은 여전히 강고하고 사회적 양극화는 극단적으로 심화되고 있으며 정의로운 세계의 꿈은 더욱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다. 백선생 자신은 여전히 희망과 낙관의 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지만, 7,80년대에 우리 문학도들의 지도이념이었던 민족문학론은 어느덧 광휘를 잃고 그 역사적 사명의 소실점이 보이는 지점까지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식인들의 의식의 역사라는 형식으로 한 시대를 정리하는 조망대(眺望臺)의 구실을 맡을 것이다.

廉武雄│영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