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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2권 해설

인간현실에 충실한 참이론의 실천

임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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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회화록』이란 이 책은 일반적인 저서의 형태와 다른, 좀 생소한 것이다. 표제의 ‘회화’란 말부터 어감이 낯설다. 하지만 좌담과 대담, 토론, 인터뷰 등을 모아놓은 내용 전체를 포괄할 만한 용어가 회화 말고 달리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이 책은 그야말로 ‘말 모음’이다. 인간이 자기를 표현하고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고차원의 형식이라면 문자=글이고, 글쓰기를 담아낸 것이 책 아닌가. 이것이 곧 인류가 도달한 문화적 형식이다. 오래전부터 관행화된 문화적 형식에 비추어 ‘말의 책’은 인간이 자기를 표현하는 원초적 성격에 다가서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둘이 혹은 여럿이 앉아서 하는 ‘모여 말하기’방식은 사랑방 이야기나 쌀롱 비평과 유사하지만 미리 주제를 정해두고 방향을 잡아서 말을 주고받게 되므로, 판을 짠 말하기이다. 이처럼 판을 짠 토론적 진술의 ‘말 모음’은 독백적인 저술과는 태생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를 가릴 성질은 아니나 ‘모여 말하기’의 방식은‘독백’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는 독서와는 달리 이런 저런 목소리를 한 판에서 같이 들을 수 있어 읽는 맛도 색다르고 얻는 효과도 풍부하다. 무엇보다도 시대적 의미가 생생하고 다양하게 드러나거니와, 진술 주체의 체취와 호흡을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다. 흔히 글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말 모음의 책이야말로 독자들 앞에 바로 그 사람이 앉아 있는 모양이다.

올해 고희를 맞은 백낙청이란 인간존재는 무엇이라고 딱히 규정짓기가 애매하다. 학문전공으로 말하면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영문학자이고, 문학활동으로 말하면 평론가이며, 사업으로 말하면 『창작과비평』(이하『창비』)을 창간해서 끌고 온 편집인이라고 해야겠는데, 근래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 대표직을 맡고 있으니 통일운동가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도 그 자신에게나 사회적으로나 경중을 따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일생의 공부와 실천의 중심은 시종일관 『창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돌아보건대 『창비』는 지난 군부독재 시절에 부단히 정치권력의 탄압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폐간 조처를 당해 한동안 잡지 자체를 발간하지 못하는 난관을 넘기기도 했다. 『창비』는 어둠의 가시밭길을 굽히지 않고 통과했을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 대항, 극복하면서 민중의 호응을 받아 성장한 것이다. 『 창비』의 어려움은 군부독재의 청산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지난 20세기 말부터 전지구적 변화에 한국사회가 휩쓸리는 국면에서 『창비』는 그 소용돌이에 말려들거나 뒤처지지 않고 우뚝 서서 중용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백낙청 회화록』 또한 『창비』와의 관계가 밀접한데 필자가 해설을 맡은 제2권의 경우 모두 아홉 꼭지 중 네 꼭지가 『창비』지면에 실린 것이었다( 『창비』가 폐간돼 대신 발간한 단행본 『창비1987』에 실린 것까지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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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와 백낙청의 만남 역시 『창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계간지가 창간된 것이 1966년 1월이고 거기에 권두논문으로 게재된 것이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였다. 『창비』 창간은 한국 현대사에 남긴 지식인 백낙청의 신고였고,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는 그의 문학적 선언이었던 셈이다. 『창비』 창간호는 나의 눈에 경이로운 지적 마당으로 비쳤다. 특히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는 문학이 무엇이고 어떻게 연구해야 하느냐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던 나에게, 눈앞에 드리운 안개를 걷어내주는 듯싶었다. 나는 당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대하여 최전방에서 군생활을 해야 했다. 그 삭막하고 답답하던 시절에 『창비』를 어렵사리 매호 구해 읽어 일종의 정신적 각성제로 삼았던 기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창비』 1970년 겨울호에 나는「황매천의 시인의식과 시」라는 소고(小稿)를 발표한다. 내가『창비』와 독자가 아닌 필자로서 관계를 맺게 된 시작이었다. 당시 백선생은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미국에 나가 있었고 염무웅(廉武雄) 선생이 고군분투하며 『창비』를 꾸려가는 중이었다. 염선생은 이 시기를 『창비』역사의 ‘토착화 과정’이라고 술회한 바 있는데 말하자면 『창비』의 토착화에 나도 끼어든 셈이다.

그 무렵에 창작과비평사는 신구문화사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신구 사옥은 청진동의 낡은 2층짜리 목조건물이었다. 아래층에 길거리를 면해서 세를 놓은 듯 물역가게, 복덕방 같은 그런 점포들이 있었고, 2층으로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제법 널찍한 공간이 출판사 사무실이었다. 그 공간을 통과해 들어가면 길쭉한 방이 나오는데 거기에 염선생의 책상이 놓여 있으니 창비의 산실이었다. 나는 그 방을 어쩌다가 들르곤 하였는데 그때 모모한 문인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한번은 검고 여윈 얼굴에 의복도 남루하여 노숙자가 아닌가 싶은 사람을 마주쳤다. 누군가 했더니 한동안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세상에 다시 출현한 천상병(千祥炳) 시인이었다.

내가 백선생을 처음 대면한 것도 그 방에서다. 1972년 말 아니면 이듬해 초였던 것 같다. 염선생을 만나기 위해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가서 2층의 그 방으로 들어갔더니 귀공자풍의 하얀 얼굴에 체구가 약간 커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백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이미지에 ‘백’이란 성까지 연상되어, 실물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범접하기 쉽지 않아 보이는 인상이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감돌아 사람을 끌어당기고 대화에 유머를 섞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다가도 간혹 콕 찔러서 긴장감을 주는 것도 같았다.

나는 백낙청을 『창비』창간호에서 글로 처음 만난 이후 6, 7년이 지나서 비로소 직접 대면한 것이다. 그때부터 친교가 지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내게는 그에 대한 아주 오랜 기억이 한 가지 입력되어 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올라가서 4·19 직후쯤에 『동아일보』에서 읽은, 한 미국 유학생이 군복무를 하기 위해 귀국, 자원입대를 했다는 기사이다. 사회면의 조그만 기사가 왜 나의 뇌리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을까 의아스런 느낌도 든다. 아마도 그 유학생이 세계적 명문인 하바드 대학의 석사인데다가 문학 전공자라고 기사에 소개된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작 주인공의 성명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백모가 아닐까 하는 짐작만 막연히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의 오랜 기억 속의 인물과 현실에서 활동하는 백모가 동일인인지 굳이 고증을 요하는 사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긴가민가 하는 상태로 여태껏 지내왔다. 그러다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런 사실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지 싶어, 인터넷을 통해 검색을 해보았다. 과연 『동아일보』1960년 11월 10일자의 지면에서 백선생의 학창시절 사진과 함께 「군문(軍門) 두드린‘어학의 천재’」란 제목의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이 어긋나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검색과정에서 백선생의 학부졸업에 관련한 기사도 접할 수 있었다. 망외의 소득이라고 할까.

『동아일보』 1959년 6월 12일자에 브라운 대학을 수석 졸업하여 졸업식에서 대표연설을 하고 하바드 대학원에 진학한 사실을 보도한 기사다. 「군문 두드린‘어학의 천재’」란 내 기억 속의 기사보다 더 대폭의 지면이 할애돼 「한국학생의 우수성을 과시—미대학서 우리 백낙청군이 영예의 졸업식 연설」이라는 가로 표제에, 「5개 국어를 통달—하바드 대학원에 무시험 합격—여러 부분의 상도 받고」라는 세로 표제가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었다. 한국적 근대서사의 한 전형적 풍경이다. ‘한국학생의 우수성 과시’에서 ‘5개 국어 통달’로, ‘하바드 대학원 무시험 합격’으로 이어지는 표제어들이 백군을‘공부의 스타’로 띄운 꼴이다. ‘하바드 대학원 무시험 합격’이 우승자에게만 주어지는 특전처럼 서술해놓고 있는데 무시험전형이 저쪽의 일반 관행이라는 사실을 짚어보면 조금 우습기도 하다. 뒤의 「군문 두드린‘어학의 천재’」라는 제목의 기사 역시 한국적 근대서사의 전형인 점에서는 마찬가지인데, ‘반공서사’로 윤색된 형태이다.

당시 유학 자체가 특권층의 일처럼 여겨진데다가 병역을 기피하는 일이 특권층일수록 당연시되는 풍조였다. 도미 유학생으로서 귀국하여 자원입대를 한 사실에 기자로서는 의문을 제기해봄직하다. “백군이 나이 어린 13세 때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6·25동란으로 붉은 침략자들에게 강제로 납치당한 비통한 현실이 그에게 그러한 결심을 하게 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기사를 끝맺는 대목에 적힌 내용인데 비록 추정어법을 쓰긴 했지만 다분히 전체 사연을 반공서사로 굴절시킨 것이다. 본인은 찾아온 기자에게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는데 무슨 기사가 됩니까?”라고 반문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한국적 근대서사의 영웅으로 등장했던 인물로서 근대에 영합하여 부귀공명을 누리는 예정된 엘리뜨 코스로 순행하지 않고, 한국적 현실에 입각해서 근대 자체를 비판적으로 따져 물어 근대 극복의 방도를 모색한 여기에서 백낙청이란 지식인이 부활한 것이 아닌가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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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회화록』 총 5권은 지난 1968년부터 최근까지 40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행해진 결과물인데 그중에서 제2권은 1985년부터 1990년까지에 해당한다. 이 5년은 역사적으로 구분된 시간이 아니고 전체 분량을 고려해 편의적으로 나뉜 기간이다. 그렇긴 하지만, 여기에 실린 말들이 대체 무슨 연유로 어떤 시대상황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잠깐이나마 둘러볼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 제2권의 배경시간인 1980년대는 어떤 세상이었던가? 군부독재가 강고하고 엄혹하게 관철된 시대인 동시에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문화운동이 약진한 ‘운동의 시대’이기도 했다. 80년대의 개시와 함께 등장해서 7년을 군림한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군부독재가 무덤 속에서 불끈 일어선 꼴인데, 그렇기에 훨씬 강력한 지배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박정희 군부독재의 극점에서 구축된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민주화의 거대한 힘, 그 대세를 거역한데다가 5·18광주민주항쟁을 짓밟고 성립한 정권이기에 태생적으로 강도 높은 저항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억압과 저항이 동반상승한 시대, 그것이 80년대였다.

이러한 억압과 저항의 길항관계가 동반상승하여 정점에 도달한 1987년, 그 싯점에 드디어 획기적 전환이 일어난다. 이 해에 전두환 정권은 소위‘4·13호헌조치’라는 것을 공포, 군부독재를 연장하기 위해 발악하다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다름아닌 6월 민주항쟁으로, 군부권력은 마침내 무릎을 꿇고 민주화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헌법이 새로 제정되고 헌정질서가 개편되어 지금의 6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6공화국이 민정당 노태우 정권으로 출발한 사실을 두고 말하면 전두환 정권과 유사한 권위주의체제이지만 그 기간에도 민주적 개혁이 상당한 정도로 실현되었으며, 이어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권이 교체되면서 정치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고 탈권위주의적 변화가 역동적으로 일어났다. 이 획기적 전환점에서 성립한 체제를‘87년체제’라고 부르는데 87년체제하에 우리가 생존하는 현재가 놓여 있다.
그리고 눈을 밖으로 돌려보면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 소련연방의 해체, 중국 천안문 사태로 이어진 세계대국의 변화가 1989년에서 1990년 사이에 일어났다. 20세기의 인류사적 실험이라 할 사회주의가 실패로 드러난 사실은 사상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거니와, 세계대국의 변화는 현실적으로 한반도의 정세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세계 냉전체제의 해체가 곧 한반도 분단체제의 해체로 이행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은 소련(러시아)·중국과 수교를 하는 등 대국의 변화에 발빠른 대응을 하였던 셈이고 남북관계에도 현저한 발전이 있었다. 1987년의 체제 전환은 한국사회가 세계대국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절차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 모음 책이 위와 같은 시대상황과 여러모로 관련된 것임은 더 말할 나위 없지만 어느 무엇보다도 주목할 대목은 억압과 저항의 측면이다. 『창비』는 1980년 부활한 군부독재에 의해서 폐간 조처를 당한다. 잡지 매체를 상실한 악조건 속에서도 단행본 출판사의 기능을 십분 활용,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문학의 현단계』(전4권)는 연속기획으로 마련된 평론집으로, 「80년대의 민족운동과 한국문학」은 바로 그 제4권의 권두좌담으로 실린 글이다. 그러면서 약간 모험을 하여 『창비』를 무크지(부정기간행물) 형태로 간행했다. 당시 잡지 매체의 출판이 허용되지 않는 조건에서 무크지라는, 잡지이면서 잡지를 표방하지 않은 기형적인 형태가 유행했던 것이다. 「김지하 시인과의 대담」은 원래 『실천문학』 창간호에 실린 것이었는데 『실천문학』은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문학인의 결사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기관지적 성격을 띠었다. 모두 1985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 ‘『창작과비평』 통산 57호’란 무크지가 나오자 당국은 출판사 자체의 등록을 취소하는 강경 조처를 취한다. 언론출판의 자유는 인민의 기본권에 속하는 사항인데 기본권을 완전히 압살한 것이다. 그것이 워낙 무리한 조처였던 까닭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여론에 밀려서 출판사의 기능은 살려주게 된다. 그러면서도 기어코 창작과비평사라는 본명을 쓰지 못하도록 하여 ‘창작사’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단계 한국사회의 성격과 민족운동의 과제」는 ‘창작사’에서 간행한 무크지 『창비 1987』의 권두좌담이었다. 1987년의 전환점을 통과하자 곧 『창비』가 복간되면서 창작과비평사라는 이름도 되찾게 되었다. 일시 쓴 ‘창작사’라는 명칭과 『창비 1987』은 저항운동의 상흔인 셈이다.

위에서 이 책이 자기 시대와 맺는 관계를 외형적인 사실로 살펴보았거니와, 내용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간략하게나마 언급해두어야 하겠다. 대체로 좌담은 주제 자체가 처음부터 그 당시의 정세나 시대적 요구를 고려해서 잡히게 마련이었다. 80년대의 시대상은 억압과 저항이 길항하는 관계로 형성되었음을 앞서 지적한 터인데, 이때의 저항은 ‘운동’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민족운동, 민주화운동, 민족민주운동, 문화운동, 노동운동 같은 용어가 빈번하게 좌담의 제목이나 본문에 오르내린 것이다. 결국 억압적으로 지배하는 현체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찾아 나가느냐 이것이 주요과제였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운동 방향이 당면한 문제이며,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근원적인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좌담에서 단골메뉴처럼 운동론이 등장한 것은 그런 때문이고 사회구성체 문제가 뜨거운 쟁점사안으로 빠지지 않았던 것 또한 그런 때문이다. 이 말 모음의 주제 내용을 따라가보면 그 시대의 정황을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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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아홉 꼭지가 실린『백낙청 회화록』 제2권은 대략 이십년 전에 발표된 것들이다. 필자는 몇 편 제외하고는 발표 당시의 지면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해설을 쓰기 위해 다시 쭉 훑어보니,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실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없을 수 없다. 좌담에 참여한 인사들 중에서 박현채(朴玄埰)·정윤형(鄭允炯) 같은 분은 이미 고인이 되어 그리운 얼굴로 떠오르는가 하면, 참 그땐 이런 사안이 쟁점이 되어 다투었지, 아 그땐 이 사람이 이렇게 사고하고 이렇게 주장했구나 하는 등 이런저런 감회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좌담이나 대담 등의 형식으로 진행된 전체의 주인공인 백낙청의 발언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특히 두 가지 점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문학과 사상은 물론, 사회과학이나 현실문제에 걸쳐 각기 전공자들과 상대해서 토론하는데, 여러 영역에서 전문가적 지식과 통찰력이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이 말 모음의 성격이 그 당시 정세와 직결되어 시사성이 강한 편임에도 낡은 옛날 테이프를 틀어놓은 것처럼 들리지 않고 두고두고 되씹는 맛이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전자가 그 자신의 문학관에 관련된다면 후자는 학인으로서의 태도, 즉 사고의 논리와 관련되겠지만 그 근본에는 인간 자세의 문제가 놓여 있다. 이 두 가지 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끝맺으려 한다.

요즈음 우리 학계에서는 학제간 연구가 강조되고 전문영역을 넘어 가로지르기를 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다. 근대적인 분과학문의 제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 말 모음 역시 근대학문의 분화된 지식의 경계에 안주하지 않고 여러 학문분야와 대화할 뿐 아니라, 현실과 소통하는 방도를 적극적으로 강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요즘 학계에서 능사로 삼는 기능적인 접합 내지 방편적인 동거와는 처음부터 성격이 다른 것이다. 서두에서 백낙청이란 인간존재는‘일생의 공부와 실천의 중심이 『창비』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전문분야는 영문학이고 전문활동은 문학비평이다. 곧 문학이 그의 전공이다. 『창비』는 그 자신의 전공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는 수단이다.

『창비』를 청년기에 창간하여 고희를 맞은 지금까지 온갖 풍상을 견디고 고난을 이겨내며 굳건히 지키고 씩씩하게 키워온 그 핵심에는 그 자신의 문학관이 놓여 있다. 백낙청의 문학관을 논하자면 말이 무한정 길어지겠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미국유학 시절을 회고한 본인의 술회를 적어둔다. “당시 미국의 대학을 지배하고 있던 신비평적 문학연구 경향이 저의 취향에 그리 맞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식의 영문학 연구가 전체적으로 서양의 사상적인 문제라든가 역사현실과는 관계없이 너무 편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국문학 연구와 서양문학 인식」, 본서 제3권 150면) 문학을 문학이라는 상아탑 속에 가둬둘 것이 아니라 사상적 문제나 역사현실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는 초발심이 문학관으로 형성되어 전생애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문학관에 스스로 충실하자면 문학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고 철학사상에 대한 공부가 깊어야 하며, 사회현실을 논리적으로 읽고 때로는 행동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문학을 통해서 철학·사회과학으로, 사회적 실천의 길로 진입한 그 방식은 말하자면 ‘인문입도(因文入道)’라 할 것이다.

당초 그때그때의 현실상황과 관련해서 나온 말들이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뒤에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이월적(移越的) 가치’를 지니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물음의 답은 다른 무엇보다 말의 주체에서 찾아야 할 줄로 생각한다. 백낙청은 언젠가 학자보다 생활하는 민중이 오히려 논리적으로 사고한다는 점을 일깨운 바 있다. 생활의 논리에서 어긋나면 굶어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생활의 논리만큼 어김없고 분명하며 삶의 진실 그대로인 글을 써보는 것이 문필업으로 나선 한 사람으로서 나의 꿈이기도 하다.”(『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시인사 1979, 3면)고, 일찍이 자기소신을 표명한 것이다. 그에 있어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일하고 놀고, 먹고 잠자는 민중생활의 논리를 제대로 체득한 그것이 참이론이라고 하겠다.

이론이 곧 실천이요 지혜의 경지인데, 부단히 진리를 지향한다. 그래서 “남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저 나름으로 그런 진리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일환”(「영미문학연구와 이데올로기」, 480면)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생활의 지혜로서의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이론투쟁에 적극적이다. 가장 실천적이고 가장 이론적인 이 점이 학인으로서 백낙청의 자세가 아닌가 한다.

이론은 본디 원칙에 확고할 필요가 있는 데 반해서 실천은 변화하는 현실에 잘 대응하는 것이 요령이다. ‘항상’과‘변통’, 이 상반되는 양자는 하나로 어울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항상이 없는 변통은 단명하고, 변통이 없는 항상은 퇴화하기 마련이다. 『창비』가 그사이 난관을 통과하고 급변한 세상을 경험하면서도 위축되지 않고 존재를 우뚝 세울 수 있었던 묘리는 다름아닌 “한결같되 날로 새로운 잡지, 나날이 새로워지되 한결같은 잡지”(『창작과비평』 1996년 봄호 10면)를 꾸려내겠다는 기본방침, 그것이었다. 그리고 인간현실에 참으로 충실하면 이론이건 실천이건 과격해질 수 없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최근에‘변혁적 중도주의’로 정리한 것 또한 일관되게 견지한 자신의 학인으로서의 자세와 직결된다고 본다.

이 『백낙청 회화록』은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소중한 역사의 증언인 동시에, 여기서 제기하고 토론한 주요사안들은 아직껏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과제임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林熒澤│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1. 백낙청 자신은 당시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하고 있다. “군대를 가려고 일부러 귀국한 것은 아니고, 어릴 때 가서 미국생활을 했는데 지겹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 왔습니다. 박사과정에 입학이 됐는데 그것도 석사만 마치고 귀국을 했는데 와서 보니깐 군대를 안 가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군대를 가야겠다고 했는데 그때 마침 4·19 후라서 그때도 군대 안 가던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던 때입니다. 그래서 징집영장 나오기를 기다리지 못해서 약간의 줄을 대서 입대를 했어요. 형식상 자원입대가 된 거죠. 그래서 동아일보에도 나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본서 제5권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150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