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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8권 해설

촛불에서 개벽까지

황정아

 

1. 백낙청의 ‘급진성’

1960년대 이래 부단히 이어진 백낙청의 활동 가운데 좌담, 대담, 토론, 인터뷰 들을 모은 『백낙청 회화록』은 2007년 첫 다섯권이 간행되고 2017년에 두권이 출간된 데 이어 이제 여덟권째에 이르렀다. 바로 앞선 7권이 선생이 주창한 ‘2013년체제’ 수립의 실패와 박근혜정부의 등장부터 2016년 겨울 촛불대항쟁까지의 시기를 다루었다면, 8권은 촛불대항쟁으로 촛불정부 1기가 들어선 이후인 2017년에서 시작하여 촛불정부 2기 수립이 실패하는 2022년까지를 아우른다. 그러니 정서적 풍향계로 본다면 7권은 실망에서 희망으로, 8권은 희망에서 다시 실망으로 향하는 정반대의 흐름으로 갈라진다고 할 수 있지만, 선생 자신의 견해에 따르면 그런 풍향과는 별도의 도도한 흐름에서 두 시기는 촛불혁명의 시대라는 역사적 특이점을 통해 이어져 있다.

시기별로 묶인 회화록을 따라 읽다보면 선생이 각 시기별 현실에 부응하여 내놓은 키워드들과 자연스레 만나게 된다. 민족문학, 리얼리즘, 분단체제, 변혁적 중도주의, 근대의 이중과제, 대전환 등 선생의 사유와 실천이 쉼없이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거듭 새로워져왔음을 일러주는 이 키워드들은 그대로 선생의 방대한 담론을 분류하는 명칭이기도 하다. ‘시기별’이라 했지만 키워드들은 제출된 시기에 밀착해 있으면서도 해당 시기의 틀에 갇히지 않고 계속해서 자라나는 한편, 다른 시기에 등장한 다른 키워드들과 긴밀히 결합하며 더 정교하고 풍성한 전체를 이룬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백낙청의 사유에서 참으로 독특하게 작용하는 요소이다. 강렬한 것들은 대개 시간과 더불어 퇴색하기 마련이지만, 특정 시기에 그의 사유가 띤 현재성의 강렬도는 오히려 바로 그 현재성이 시간을 가로질러 지속할 것임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선생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고 말하는 데는 주저하게 된다. 짐작건대 시대와 함께했다는 흔한 문구를 그에게 적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겠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의 사유는 언제나 시대와 함께했으나 시대가 그것을 제때 채택한 적은 드물었다. 그의 혜안은 대체로 ‘결국은’ 받아들여지지만 공개적인 승인을 동반하기보다 어느샌가 슬그머니 그렇게 되어 있기가 일쑤이고 그 경우조차 선생이 강조했던 핵심이 잘 간직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는 선생이 언제나 대세적 인식의 ‘결을 거스르는’ 사유를 해왔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이 점은 비판적 인식이나 저항담론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례로 선생이 이따금 회상하듯이 혁명적 전망들이 범람했던 1980년대에 그의 사유는 ‘소시민적’이라는 비난을 받은 바도 있다. 하지만 1990년대를 거치며 이런저런 혁명주의들이 ‘대안은 없다’를 승인하는 광경이 목도되고서야 그의 사유가 갖는 실질적 저항성이 뒤늦게 돋보였던 것이다. 이 어긋남은 사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선생이 촛불혁명을 말할 때부터 혁명에 대한 기존 정의를 들며 반박하던 이들이 대선 실패와 함께 혁명이라는 의제자체를 마음 편히 망각하려 한 데 반해, 선생은 한층 다각도로 촛불혁명을 지속시키는 담론적 실천을 수행하고 있다. 이번만큼은 그의 사유가 늦지 않게 대세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하는데 이는 곧 2023년 현재 우리가 견디는 ‘변칙적’ 시간의 결말과도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밀착하면서도 어긋난다는, 선생의 사유가 취하는 이런 시대적 존재양식을 가리키는 적절한 이름은 다름 아닌 ‘급진성’이라 본다. 1980년대를 풍미한 여러 급진적 담론의 세례를 통해 주의주장에 입문한 필자가 선생의 사유에 거듭 매혹되는 지점도 바로 그런 면이다. 선생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따르는 이들 가운데서도 급진적이라는 규정이 부적절하다고 느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과격하게 치우침으로써 기존의 균형을 깨고 남 먼저 치고 나간다는 것이 급진성을 둘러싼 일반적인 인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선생의 담론은 지난 역정의 어느 지점을 단면으로 자르더라도 늘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치로 균형 잡혀 있고 또 최대치로 전체를 아우르는 형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런 최대치야말로 현 상태의 불균형을 바로잡으며 진짜 한걸음 나아가는 ‘급진적’ 방도임을 그의 사유를 통해 거듭 깨닫게 된다. 한반도 분단체제와 관련된 키워드인 변혁적 중도주의를 그 맥락에서 잠시 떼어낸다면, 그것은 치우침 없이 중심을 잡는다는 의미에서 ‘중도’이면서 기존 사유의 틀을 깬다는 의미에서 ‘변혁적’인 백낙청 특유의 급진성을 묘사하기에 맞춤한 표현이다. 그때그때의 시류에서 최첨단으로 통용되는 입장을 취해 일말의 정치적·윤리적 꼬투리도 주지 않는 대신 ‘일이 되게 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여러 급진주의에 비해, 선생의 원만하기 짝이 없는 급진성은 평소에는 그리 눈길을 끌지 못하기 쉽다. 그러나 전면적인 전환이 아니고서는 헤쳐나가지 못할 위기의 순간 그것이 불가결한 대안임을 알아차릴 기회가 생기는데, 지금 바로 그런 시기를 우리는 살고 있다.

 

2. 촛불혁명이라는 화두

8권에 실린 대화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촛불혁명이 백낙청의 사유에 미친 영향이다. 선생은 2016년에서 2017년 사이의 촛불을 ‘촛불대항쟁’으로 명명함으로써 그 이전의 여러 촛불항쟁과 구분하는 한편, 그것이 혁명이냐 아니냐와 관련해서는 촛불혁명 자체를 붙잡고 연마할 ‘화두’로 규정함으로써 논쟁을 정리한다. 사실 촛불대항쟁을 ‘혁명’과 연결한다는 생각 역시 주요하게는 선생의 발상에서 출발했다. 법이 지켜지는 나라를 만들려는, 겉으로 보기에 다분히 체제수호적인 구호가 ‘이면헌법’이 지배해온 사회에서 혁명적 의미를 갖는다는 발상, 더 나아가 그런 구호에 다 표현되지 않은 거대한 열망이 ‘혁명’의 한 계기이자 출발점이라는 발상 말이다. 촛불혁명을 화두로 삼아 연마하자는 선생의 제안에서 화두라는 표현은 촛불이 과연 혁명인가 하는 질문에 정답을 찾아보라는 뜻이기보다 바로 그 질문을 통해 촛불이 혁명이기 위해 필요한 실천들을 수행하자는 데 핵심이 있다. 그 말은 촛불혁명은 우리가 화두로서 붙잡고 있는 한에서 지속되는 “아주 독특한 혁명”(167면)이라는 뜻도 된다.
촛불대항쟁에 잠재된 촛불혁명의 서사를 써나가자는 제안으로 선생의 주장을 이해한다면, 그 서사의 결정적 단서는 촛불대항쟁의 대표 구호였던 ‘이게 나라냐’는 물음이다. 그로부터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라는 과제에 이르고, 이는 다시 한반도 남쪽에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 어째서 (이름값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세계사적 사건이어야 할) ‘혁명’인지 밝히는 일로 이어진다. ‘나라다운 나라’라는 촛불혁명의 첫 문장이 그의 사유에 어떤 파동을 만드는가, 그리고 그 파동이 어떤 무늬를 그려내는가 하는 점이 회화록 8권의 흥미로운 포인트이자 선생의 최근 사유 전반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이다.

“우리가 촛불시대에 살고 있으며 촛불을 화두로 잡고 생각해야 하고 판단해야 한다”(165~66면)는 점을 설득하려는 선생의 노력은 8권이 아우른 시기의 핵심적인 사건인 2022년 대통령 선거 전후의 대화와 강연에서 한층 뚜렷하고 절실해진다. 대선 결과로 들어선 정부의 무도함을 쓰라리게 겪는 현시점에서 돌아보면 그런 노력이 얼마나 긴요했는지가 드러난다. 촛불을 화두로 삼자는 자신의 제안을 누구보다 철저히 실천하듯 선생은 정권연장이냐 정권교체냐 하는 구도가 촛불혁명 지우기에 다름 아니라 지적하고, 대선의 진정한 실상은 “진짜 촛불혁명이 계속되느냐 못 되느냐가 판가름 나는 그런 건곤일척의 큰 싸움”(181면)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대결의 성격을 간파하고 터무니없는 인물을 내세우면서까지 간절히 싸운 쪽은 오히려 반촛불세력이고 그들과 맞선 이들은 스스로를 뒷받침할 강력한 힘의 원천인 촛불혁명을 제때소환하지 못했다. 촛불혁명이 ‘화두’라면 망각이야말로 혁명에 대한 중대한 배반이기에 지난 대선은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이미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대선을 전후한 선생의 발언에서 또 하나 곱씹을 대목은 반촛불세력이자 한국사회 부패 구조를 형성한 엘리트 카르텔에 관한 언급이다. 대통령을 포함한 상당수의 고위 공직을 차지하며 행정권력을 착착 장악해 들어간 검찰세력을 비롯하여, 법조계, 경제계, 학계 등 주요 분야에서 결정권을 거머쥔 자들이 강고하고 촘촘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는 숨김없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도 선생이 보기에는 촛불이 만든 변화이다. 엘리트 카르텔을 부패의 한 유형으로 파악하고 나면 납득하기 어려웠던 언론계의 전반적 타락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진보적이라 분류되던 언론이 진실추구나 권력비판 면에서 기대와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이른바 ‘레거시 언론’ 일반이 “엘리트 카르텔 부패에 미국보다 훨씬 더 깊이 연루”(272면)되어 있고 진보언론조차 그런 ‘레거시언론’의 일부로서 “카르텔에 알게 모르게 가담해버”(177면)린 결과이다. 이런 진단을 통해 뒤돌아보건대 1만호 발간에 즈음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도 이미 어떤 긴장이 감지된다.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는 지금가장 중요한 요충지”(277면)인 민주당의 지지부진함 역시 그 일부가 엘리트 카르텔에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선생이 엘리트 카르텔을 중요하게 언급한 것은 그 카르텔이 온갖 부문에 걸쳐 있고 따라서 촛불과 반촛불의 대결이 ‘내부 전선’의 형태로도 벌어진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 때문이지, 카르텔의 강고함을 한탄하고 한국사회의 후진성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선생은 오히려 미국같은 나라가 “엘리트들이 상당부분 자기 기능을 하는데도 맥을 못 추는사회”라면 “우리는 사실 엘리트층 빼면요, 그렇게 부패한 사회가 아닙니다”(182면)라고 단언한다. 나아가 “우리 국민은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272면)고 강조하는데, 이런 ‘살아 있음’이 촛불혁명의 지속과 이어져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3. ‘글로벌 스탠더드’로서의 개벽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로 촛불혁명을 묘사한 선생은 일찍이 바로 그 과제의 달성을 꿈꾸며 싸운 역사적 선례로서 동학, 그리고 동학 이래 한반도 특유의 사상이 응축된 ‘개벽’에 주목한다. 선생의 사유를 상세히 따라 읽어온 독자가 아니라면 회화록 8권의 주요 키워드인 ‘개벽’을 두고 뜻밖이라 느낄 법도 하다. 이런 느낌은 ‘나라만들기’가 어째서 ‘새세상 만들기’와 이어지는가 하는 질문을 내포한다. 동학과 개벽으로 가는 일종의 중간단계로 선생은 “주민생활 전역에 걸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민중의 주체적 역량이 크게 향상”1)된 점을 상기하며 촛불과 3·1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한 바 있는데, 촛불을 말하며 3·1과 동학을 상기한 것은 수사적 표현이나 유사성의 확인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적 기준을 근거로 촛불의 혁명 여부를 따지는 논쟁구도를 깨는 한편으로, 촛불혁명이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싸움을 넘어 사상적 차원을 갖는 사건임을 밝히는 시도이다. 촛불이 맞닿아 있는 3·1과 동학을 다름 아닌 사상 전통으로서 적극 재해석하는 작업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선생은 근대 전체에 걸친 “절박한 현안”2)으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이야기해왔고, 적응을 방기한 극복이 불가능하듯이 극복을 염두에 둘 때만 적응 역시 원만해진다고 역설해왔다. 그와 같은 이중과제론의 관점에서 3·1은 “한반도에서 주체적 근대적응의 출발점”이자 “근대극복 노력의 본격적 출발”이고3) 3·1이 이런 사건일 수 있었던 것은 동학이 먼저 있었던 덕분이다. “동학운동과 농민전쟁을 거친 민족이기에 3·1의 대규모 민중운동이 가능했고 동학의 개벽사상이 있었기에 민주공화주의로의 전환과 새로운 인류문명에 대한 구상이 한결 수월했”4)다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에서 흥미진진하게 논의되다시피, 동학은 서학, 다시 말해 서구적 근대와 가장 치열하게 대결하며 그 극복을 모색하는 과정에 형성되었고 바로 그 점에서 하나의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촛불혁명은 그렇듯 동학이 의제화하고 3·1이 본격화한 이중과제 수행의 계승이자 도약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선생의 사유에서 ‘개벽’은 동학운동이나 그 이후 몇몇 종교운동에 궁극적으로 귀속되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며, 척사파나 개화파에 비해 이중과제론적 관점과 실천이 돋보였던 한말의 특정 입장과 인물들을 지시하는 역사적 명칭만도 아니다. 선생은 ‘개벽’을 한국사상사의 중심에 세우는 동시에 다시금 살아 있는 우리 시대의 첨예한 문제의식으로 전면화하고자 한다. 촛불혁명에 관한 담론에서 굳이 ‘개벽’을 말하는 이유 하나로 선생은 “근대 세계체제 자체가 말기국면에 진입한바 한국과 한민족이 앞장서 이 현실을 타개하고 새세상을 열어갈 전망을 공유하자는 의미”5)를 들었는데, 바로 그렇듯 ‘나라만들기’를 단순히 근대적응을 위한 국민국가 건설로서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거대한 전환, 곧 ‘새세상 만들기’의 기운과 전망 속에 실천했던 것이 동학과 3·1의 개벽사상이었다. 한반도에서 자본주의적 근대가 시작되면서 혼란과 더불어 가능성이 엿보이던 시기가 두 운동의 배경이었듯, 선생의 진단에 따르면 다시금 기운이 바뀌고 전환이 요구되는 근대의 ‘말기국면’이 현재의 객관적 정세이다. 이런 때에 이중과제를 실천한다는 것은 개벽에 값하는 대전환의 수행과 겹쳐진다는 것이다.

선생의 개벽론이 갖는 독창성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개교표어에 대한 해석에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은 이 표어가 물질과 정신을 나눈 서구적 이분법과 무관하다고 강조하면서, 여기서의 물질개벽이란 “천지개벽하던 물질적 개벽이 아니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변화”이며 “그 변화의 원동력은 자본주의”(125면)라고 설명한다. 그와 같은 세상의 변화를 감당하고 이겨내는 것이 정신개벽이라 할 때 그 정신 역시 “실체가 아닌 어떤 ‘경지’”를 가리키는, “서양에 없는 개 념”(123면)이다. “‘물질’의 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는 가운데 인간의 정신이 쇠약해져 문명의 노예로 변하고 있는 상황을 정신개벽을 통해 넘어서자는 것”6)을 개벽의 요체로 파악하면 그 문제의식이 근대의 이중과제론과 맞닿아 있음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선생에게 개벽은 이중과제론의 또다른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개벽은 이중과제론이 제시한 ‘근대극복’을 체제전환을 넘어 문명전환이라는 더 고양된 지평으로 이끄는 한편, “이중과제의 실제 완수에 필요한 심법(心法)과 실천 요령에 관해 ‘근대’ 논의에서 곧잘 간과되는 세세한 사항까지 챙기”7)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지침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중과제론적 사유가 한반도에서 개벽사상이라는 ‘사례’로 발현했다는 식의 묘사는 불충분하다. 오히려 이중과제가 “‘물질개벽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이라는 한반도 고유의 사상을 수용함으로써만 원만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성격”8)이며, 그런 점에서 개벽사상은 오늘날 이중과제의 성취를 좌우하고 가늠할 ‘글로벌 스탠더드’로 제시된다. 선생은 “새로운 나라만들기를 진행함과 동시에 현대세계가 당면한 난제의 해결에 한국의 사상적 기여 가능성이 보태진다면 한반도가 전지구적 후천개벽의 진원지가”9) 되리라 전망하는데, 그렇듯 ‘나라만들기’와 ‘사상적 기여’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동학에서 촛불로 이어지는 고유한 혁명 전통이라고 덧붙일 수 있겠다.

서구의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보편사상적 해명이 범람하는 가운데 정작 우리의 역사적 사건을 두고 그런 시도가 이루어진 적은 드물었다. 그리고 그 드문 시도조차 다시 서구 사상에 기대기 십상이었다는 점에서 선생의 개벽론은 사유의 ‘관행’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시인 김수영을 논한 이 책의 대담에서 선생은 ‘개벽파적’ 면모를 언급함으로써 개벽이라는 ‘표준’이 문학비평에도 작동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어 D. H. 로런스를 ‘서양의 개벽사상가’로 호명한 대목에 이르면 선생의 사유가 실로 담대하게 스스로를 시험하고 입증해왔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개벽을 한반도의 사상적 표준으로 세우는 동시에 세계사적 표준으로 제시한 선생의 작업은 서구를 향한 저항과 대안이라는 점에서 ‘탈식민적’ 실천으로도 부름직하지 않을까? 이 한반도식 탈식민주의를 더 궁구하리라는 다짐으로 해설의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黃靜雅|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1.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68면. 

  2. 같은 책 52면.

  3. 같은 책 63면.

  4. 같은 책 62~63면.

  5. 같은 책 20면. 

  6. 백낙청 「2023년에 할 일들: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창작과비평2』 023년 봄호 29면.

  7. 같은 글 30면.

  8. 백낙청, 앞의 책 22면.

  9. 같은 책 21~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