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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창비문화 인터뷰 3: 한결같되 나날이 새롭게

‘창비’ 30년을 듣는다

백낙청(『창작과비평』 편집인)

고은명(창작과비평사 편집자)

*이 인터뷰는 격월간 『창비문화』 1996년 11~12월호에 실린 「기획연재: ‘창비’ 30년을 듣는다」의 한 꼭지이다.
 

고은명 『창작과비평』 창간 30주년을 맞아 『창비문화』에서 ‘창비’의 30년 역사를 되짚어보는 기획 인터뷰 ‘창비 30년을 듣는다’를 지난 1년간 연재해왔는데요. 오늘 선생님과의 이 대담이 기획을 마무리짓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지난 9호(1996년 5~6월호)에서 선생님은 80년 『창비』가 폐간되는 얘기까지 하셨지만 그 뒤에 김윤수(金潤洙)·이시영 두 선생님이 80년대 이후 얘기를 많이 해주셨으니 오늘은 거기에서 빠진 얘기를 주로 했으면 좋겠어요. 그간의 대담들을 읽으면서 느끼신 바도 많았을 텐데 혹 다른 분의 말씀을 보충하거나 바로잡으실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시지요.

백낙청 다른 분의 말씀들은 대충 알던 이야기인데도 각자가 직접 겪은 이야기들을 해줘서 새삼 다시 인식하게 된 대목도 있었고, 나로서는 무척 잘 읽혔어요. 아미 ‘창비’의 역사를 좀 알고 관심이 깊은 독자일수록 이번 기획이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에 30주년을 맞아 행사도 치르고 특집도 만들고 계간지에 연혁도 싣고 하면서 모두들 느꼈겠지만 잡지와 출판사의 역사를 알려줄 자료가 너무도 빈약하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60년대는 아예 사진 한 장도 없고 그후로도 주로 행사 사진 몇 장 빼고는 거의 없고…… 탄압받고 감시받는 상황에서는 누구나 당장 필요한 자료 말고는 보관을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나 개인으로서도 1965년, 그러니까 『창비』 창간 전에 남정현(南廷賢)씨 『분지』 사건 때 작가의 구속을 항의하는 글을 『조선일보』에 썼다가 처음으로 정보부 신세를 지고 가택수색을 당한 이후로는 일기 쓰는 습관을 끊어버렸거든요. 다른 자료도 잘 보관을 않고요.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사사(社史) 같은 것을 하나 준비할 때가 되었고 이번 기획이 그 예비과정의 일부는 되리라고 믿습니다.
빠진 이야기를 하라는 주문이 기왕에 나왔으니 이미 고인이 된 분 중에서 ‘창비’로서는 잊어서는 안될 은인이고 세상에 이름이 드러난 바는 적으나 주위의 수많은 벗들이 사랑하고 따르던 고 박윤배(朴潤倍) 사장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어요. 일부에서는 그를 단순한 협객 정도로 알고 있지만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호남아만이 아니고 지모와 경륜이 출중한 인걸이었지요. 나와는 중학교 입학 동기지만 그는 입학하던 해 곧장 유급이 되는 바람에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내가 72년 미국서 돌아온 뒤였습니다. 원래 채현국씨 아버님이 경영하는 탄광의 일꾼으로 출발하여 거기서 현장 소장을 하면서 노조도 만들고, 그곳을 나온 뒤로는 함께 나온 친구들과 탄광사업을 하다가 88년에 타계했는데, ‘창비’가 어려울 때마다 물질적으로도 많이 도왔지만, 언제 만나도 새로운 용기를 얻고 자주 안 보다가도 만나면 깊은 의논상대가 되어줄 수 있는 지기(知己)가 있다는 즐거움이 내게는 더 중요했지요. 주변 문인들 중에서도 염무웅 선생이나 김지하, 황석영씨 등이 가깝게 지낸 때가 있었으니 언젠가 그의 모습이 더 널리 알려질 날이 올 겁니다.

고은명 좀 다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신동엽 창작기금에 관해서도 이제껏 언급된 바가 없는데요. 『창비』가 폐간되고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사건으로 세무조사를 받는 등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던 82년에 이 기금을 제정했는데 그 전후 얘기도 좀 해주시지요.

백낙청 신동엽(申東曄) 시인을 기념하는 사업을 하자는 제의는 부인 인병선(印炳善) 여사 쪽에서 먼저 해오셨어요. 상을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우리는 비록 중단상태지만 만해상이 이미 있고 또 상보다는 어려운, 젊은 문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창작지원금 제도를 만드는 것이 더 의의 있겠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씀드렸지요. 인여사도 흔쾌히 동의하시더군요. 나는 그때 ‘창비’가 아무리 어려워도 유족의 돈만으로 이 기금을 운영하는 건 도리가 아니고 또 ‘창비’가 손을 대는 이상 언젠가 유족측에 사정이 생기더라도 우리 힘으로 끌고 나갈 수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지원금을 반반씩 부담키로 했습니다. 1회 이문구(李文求)씨로 시작해서 많은 분들이 매년 한 명 혹은 두 명씩 지원을 받아왔고, 몇 해 전부터 인여사께서 짚·풀 문화 연구와 박물관 사업에 몰두하시게 되면서는 ‘창비’ 단독으로 1년에 한 명씩 지원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큰 재단에서 더 거액의 지원도 많이 합니다만 역시 신동엽 선생의 이름을 단 지원금이라 상의 성격도 갖게 마련이고 그 점은 날로 더 두드러지는 것 같아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원금이므로 현재도 만해상보다 금액이 많은데, 앞으로 회사 형편이 나아지는 대로 액수를 더 올리거나 수혜자를 다시 두 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은명 연혁을 보면 『창비』의 폐간 시기인 80년대 전반에는 주로 책을 통해서 선생님이 드러나는데요.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내셨나요?

백낙청 활자로 나온 연혁만 봐서는 역사가 다 안 보인다는 예가 아닐까요?(웃음) 실제로 80년대 전반은 어려움도 많았지만 김윤수, 정해렴(丁海廉), 이시영 이런 분들이 ‘전면가동’이 되고 잡지 편집의 부담도 없고 해서 나로서는 모처럼 복귀한 강의생활에 힘을 쏟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지요. 74년에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창비’ 일을 어찌 감당했을까, 게다가 80년에는 잡지 폐간을 안해줬다면 영문학 교수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라고요. 이쯤 되면 아전인수도 수준급이라 하겠지만(웃음) 아무튼 이래저래 세상 은혜가 막중하지요.

고은명 출판사가 등록 취소된 후 문공부가 86년 8월 ‘창작사’로 신규 등록을 받아주면서 요구한 여러가지 사항 중 선생님의 ‘창비’와의 완전 단절을 서류상으로 구비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그때의 심경은 어떠셨는지요?

백낙청 뭐 심경이랄 게 있나요. 서류 한 장 써달라니까 써준 거지요. 정말 어렵기는 그런 요구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인데 김윤수 선생이 10호에 비교적 상세히 말씀하셨지만, 그때 건강도 본래 안 좋은 김선생의 고생은 옆에서 지켜보기가 참담할 지경이었어요. 그렇다고 내가 나서면 될 일도 안될 판이고…… 그런데 김선생이 하나 빼놓으신 건, 협상 막바지에 가서 그쪽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은 거예요. 구멍가게 규모인 우리 회사를 주식회사로 만들어 ‘중립적인 인사’를 몇 명 이사로 넣자는 거였어요. 그러자 그때까지 어질어터진 사람으로만 보이던 김선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협상 결렬을 선언했지요. 그쪽에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자기네가 못된 놈으로 지목한 나한테 김선생님을 무마해달라는 부탁을 해올 정도였어요. 내가 ‘베트남 휴전협상’을 운운했던 건 지루하고 힘든 과정이라는 뜻뿐 아니라 협상 주역의 솜씨와 결단력도 포함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고은명 90년대 낸 『소설 동의보감』이 밀리언쎌러가 되면서 ‘창비’가 비로소 재정난에서 벗어난 것으로 아는데요. 그후 간간이 베스트쎌러를 내면서 ‘창비’의 상업주의 운운하며 비판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물론 지난해 『뿌리와 날개』 창간 1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창비’가 독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출판사로 선정되는 등 ‘창비’의 평판은 여전히 높다고 봅니다만.

백낙청 올해 30주년 행사들을 치르면서 ‘창비’의 명성과 평판이 더 높아진 것은 틀림없다고 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노력해서 기대에 부응하느냐는 것이지요. 『소설 동의보감』 덕에 ‘창비’가 만년 적자를 벗어난 건 사실이에요. 그 책은 소설로서 결함도 있고 또 잘못된 민족주의를 고취할 위험도 있습니다만 『소설 동의보감』의 성공에 편승해서 나온 수많은 역사소설들 대다수와는 차원이 다른 작품이라고 봐요. 먼저 작가가 자신의 목숨과 바꿀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쓴 것이 느껴지고요. 또 우리 역사와 민중에 대한 깊은 애정은 비록 오용의 소지가 있으나 그 싯점에서 값진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설 동의보감』으로 돈을 벌었을 때는 욕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창비’가 좋은 일을 많이 하더니 드디어 복을 받았다고 덕담을 해주신 분도 있었고, 어떤 분은 황소가 뒷걸음질치다가 개구리를 잡았다고 호의 어린 농을 걸어오기도 했습니다. 정작 말이 나기 시작한 건 최영미(崔泳美)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때인데, 뒷걸음질로 개구리를 또 잡은 것도 석연치 않고 광고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시집으로서도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은 내가 활자로도 밝힌 바 있고, 시집을 낼 때 좀 팔리리란 예상들은 했지만 그런 선풍을 일으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 않고 낸 것이니 상업주의 운운은 가당찮지요. 더구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든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같은 책을 내서 ‘창비’의 물적 토대를 키우는 것이 상업주의라면 그런 상업주의에는 앞으로 더욱 매진해도 좋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은, 지난호에 이시영 부사장도 말했듯이 시장경제의 논리와 ‘창비’ 고유의 지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 혹은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지하는 일이겠습니다.

고은명 ‘창비’에서는 씨리즈물로 신서, 시선, 교양문고, 아동문고 등을 내고 있는데요. 각 씨리즈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주세요.

백낙청 그러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것 같고 또 그건 내가 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나 본위의 정정사항을 말한다면, 김윤수 선생이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과 달리 ‘창비아동문고’는 내가 시작했고 한동안은 책마다 내가 쓴 발간사가 권말에 실렸어요. 그런데 언제부턴지, 잠깐 내가 한눈파는 사이에 없애버렸더군요.(웃음)

고은명 현재 『창비』 주간이신 최원식 선생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백낙청 사실 최선생과의 첫 만남은 그리 행복한 게 못 되었어요. 70년대 중반 언젠가, 당시 이미 『창비』에서 기고하고 있던 김흥규(金興圭)씨가 우수한 후배의 글이라면서 평론을 가져왔는데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요. 이효석에 관한 글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때 내 생각이, 뭐 한창 패기를 보여야 할 젊은 사람이 새삼스레 이효석 타령을 하고 있나, 이런 느낌이었지요. 그래서 청진동 신구문화사 근처의 ‘귀향’ 다방인지 아니면 그 옆에 또 하나 있던 다방에서인지 김흥규씨하고 함께 만나서 대충 그런 뜻의 이야기를 하면서 돌려줬어요. 그때 최선생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별 대꾸가 없는데 그다지 유쾌한 표정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후 얼마 안되어 최선생은 대구에 취직이 되어 내려갔는데, 한참 뒤에 「가사(歌辭)의 소설화 경향과 봉건주의의 해체」라는 글을 보내왔어요. 염선생과 내가 읽고 두말없이 실었지요. 1977년 겨울호였을 겁니다. 그 뒤로 「‘은세계’ 연구」 등 역작을 연달아 써내는데 그 일취월장하는 모습이-지금은 같이 늙어가는 처치라 이런 표현은 실례가 되겠지만-‘참 귀엽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지요.(웃음)

고은명 끝으로 최주간님을 포함한 ‘창비’ 편집진에게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시고 독자들에게도 인사를 해주시지요.

백낙청 최주간과 나머지 편집진을 나눠서 말해보지요. 최선생에게는 기왕에 주간이 되었고 또 나는 작가회의 회장까지 맡아서 ‘창비’ 일에서는 원래 계획보다도 더 급속히 멀어지게 되었으니 최주간이 좀더 많은 시간을 ‘창비’에 할애해달라, 그러나 학자와 문인으로서의 정진은 멈추지 마시라, 뭐 이런 뻔하면서도 어려운 주문이고, 편집국의 실무자들에게도 취지는 대동소이합니다만, ‘창비’는 앞으로도 모든 성원의 헌신성이 없이는 제 구실을 하기 어려운 사업이니 각자가 지위에 관계없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자세로 일해주기를 부탁하고 싶어요. 사실 이런 자세로 일하는 방법은 각자가 알아서 계발해야 하는 것이고, 그게 ‘창비’에 있든 다른 곳에 가든 자기 인생의 주인노릇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로 말하면, 우선 ‘창비’처럼 광고 수입도 미미하고 기업이나 재단의 배경도 없는 집단에는 그분들이야말로 우리를 먹여 살려주는 은인이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만드는 책이란 게 아무리 명저라 해도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흰 종이에 검은 잉크를 묻혀놓은 죽은 물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독자들이 우리 물건을 팔아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러 『창비』가 너무 어렵다거나 우리 실수로 시원찮은 글이 실렸더라도 그냥 덮어버리지 마시고 끝까지 읽고서, 비판하고 욕이라도 해주시는 것이 죽은 물체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복 짓는 일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