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록]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
문학평론가 백낙청과의 대화
백낙청(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
황종연(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과 교수,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
2005년 12월 23일 창비 심학산방
* 이 인터뷰는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에 실린 것이다.
『창작과비평』(이하 『창비』)이 2006년 봄호로 창간 40주년을 맞았다. 지난 40년 동안 넓게는 한국사회의 공론 영역의 발전에, 좁게는 문학저널리즘의 발전에 『창비』가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문학만 놓고 보더라도 지난 40년 동안 한국 작가 및 비평가 들 사이에 존재하는 민족적 양심은 바로 『창비』를 통해, 또는 『창비』 덕분에 진지하고 강력한 목소리를 얻었다. 민족문학이라 불리는 그 문학적 입장을 둘러싼 논란이야 어찌되었든 『창비』는 문학을 한국사회의 창조적인 활동영역으로 유지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창비』의 공적은 문예지 발행이 창조, 실천, 운동 등의 아우라를 잃어버린, 문학저널리즘이 전반적으로 혼미한 형세를 보이고 있는 최근의 사정에 비추어보면 한층 빛난다. 창간 40주년을 맞아 『창비』가 시작하는 ‘도전인터뷰’ 첫회에 이 잡지의 편집인이기도 한 문학평론가 백낙청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문예지로서 『창비』의 역할을 계속 이어나갈 방법이랄까 원칙이랄까 하는 게 무엇인가를 우선 듣고 싶었다.
백낙청 40년의 세월이 잡지로서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요. 『창비』는 창간 40주년을 맞아서 인생을 기준으로 불혹의 나이라고 하기보다, 잡지의 수명은 개인의 수명보다 훨씬 길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이제부터 정말 젊어지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그런데 요즘 문예지뿐 아니라 진지한 태도로 담론을 하는 잡지들이 다 힘든 풍토 아니에요? 『창비』는 어떻게 보면 이중으로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학계간지들이 다들 어려움에 부닥쳐 있지만 그래도 황교수가 관여하시는 『문학동네』처럼, 말하자면 문학에 ‘올인’하는 잡지가 확실하게 독자층을 잡기가 낫지 않나 싶어요. 지금 『창비』는 절반이 문학지이고 절반이 정론지를 지향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한 정론지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요. 상업화되거나 아니면 전문분야별로 세분화되거나…… 그러나 지난 한해 동안 우리 내부에서 여러 토론을 한 끝에 『창비』는 죽으나 사나 현 체재로 가자, 문학지 겸 정론지의 모양새를 유지하자고 했어요. 다만 담론개발을 좀더 현장감있고 시의성있게 해나가고, 문학지면도 우리 문학현장에 한층 밀착해서 만들어보자는 각오를 했죠. 어쨌든 문예지로서의 역할을 고수하고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창비』가 40년간 문예지로서 인정을 받아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사실 꽤 완고한 문학주의자거든요.(웃음) 문학주의자라는 말이 꼭 적당한 표현은 아니에요. 문학과 이른바 문학 이외의 것이라는 것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있어서 그 경계선 이쪽의 문학만 한다는 의미의 문학주의자는 아니고, 문학을 제대로 하다 보면 문학 이외의 것으로 저절로 연결이 되어나가는데 그러기 위해서도 문학을 문학 자체로 제대로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문학주의자라고 할 수 있죠.
자신이 실은 문학주의자라는 그의 말이 내겐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문학주의가 문학을 그 이외의 활동과 분리시켜 생각하고 숭상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문학 고유의 역할과 권능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면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문학주의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1990년에 나온 『민족문학의 새 단계』로부터 계산하면 16년 만에 새로 묶여 나오는 백낙청의 평론집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원고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분단체제극복을 비롯한 지구시대 한반도 주민의 과제와 관련하여 문학의 주도적 역할 또는 문학 본연의 임무를 반복해서 강조한 발언들에서다. 현재 우리 문단이나 학계는 문학의 탈신비화라고 부를 만한 사태 이후를 살고 있어서, 문학의 주도성 주장이 일각에서는 엘리뜨주의나 아니면 기타 수상쩍은 반동주의로 비칠 소지가 많기 때문에, 그런 발언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는 문학을 탈신비화하고 변방화하는 구미의 이론에 어느 누구 못지않게 밝을 텐데도 오히려 문학을 창조적인 사업의 중심에 놓고 있다.
백낙청 문학의 탈신비화라고 말한 그런 큰 흐름이 있는 게 사실이에요. 세계적으로 그런 대세가 있고, 또 그것이 국내에 들어와서 대학의 문학학과 안에서도 그런 흐름이 점점 커가고 있는데요. 아까 내가 문학주의를 두 가지로 구별했는데, 전자의 경우 그야말로 문학을 문학 이외의 것으로부터 완전히 절연시켜서 신비화하는 그런 문학주의니까 이런 식의 문학주의를 비판하고 문학을 ‘탈신비화’하는 노력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의 문학주의, 문학을 통해 문학 이외의 것과 만나기 위해서라도 문학을 문학으로서 제대로 해야 한다는 의미의 문학중시사상마저 부정하는 ‘탈신비화’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글에서도 썼습니다만, 나의 이론적 입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술의 진리가 과학의 진리보다 오히려 한급 높은 진리라는 거예요. 따라서 이론에 대해서도 그것이 순전히 이론작업인 한에서는 창조적인 작품을 수용하는 비평작업보다 한급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내 나름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이론이라든가 예술이론, 또 문학을 해체하고 비판하는 이론에 대해 공부해서 도달한 입장이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문학에 대한 신념이라는 것은 동시대 모국어의 문학에 대한 신념 없이는 강력해지기가 힘든 법인데, 일종의 신상발언이 되겠지만, 한국문학과 나의 관계는 원래 그렇게 자연스럽거나 밀착된 관계는 아니에요. 젊어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했고, 또 전공분야가 서양문학이고, 거기다가 문학에 전념할 수 없는 생활을 많이 해왔어요. 말하자면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떠나갈 사유가 나이가 들수록 많아진 셈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처지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국문학의 창조적 활기를 거듭거듭 확인함으로써만 한국문학의 현장을 아주 떠나지 않는 게 가능했지요. 현장에서 좀 멀어져 있다가도 어느 순간에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챙겨 읽다 보면 내가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창조적인 현장이 여기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곤 했어요. 최근에도 훌륭한 시집을 여러 권 만났고, 박민규(朴玟奎)나 김연수(金衍洙), 김애란(金愛蘭) 같은 신예 소설가들의 작품집을 읽으면서 많은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아직 절반쯤밖에 못 읽은 처지라 중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 흥미진진한 역작이라는 언급 정도로 넘어가렵니다만, 박민규나 김애란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더 이야기해도 좋겠습니다.
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은 문학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한국문학에 대한 백낙청의 관심은 두말할 것 없이 민족문학론으로 요약된다. 그의 민족문학은 어떤 확고한 신념의 표현임은 분명하지만 개념적으로 유연한 용어이다.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지고 있는 그의 민족문학론은 그때그때 시대적 상황에 빠르게 대응하면서 그 외연을 변경시켜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평론집에도 시대적 과제에 대응하여 민족문학의 개념을 조정하려고 노력한 자취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민족문학이라는 용어가 과연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종래에 민족문학을 지지하던 사람들 사이에조차 퍼져 있는 의문에 응답하여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이라는 의미에서, 작금의 전지구화 상황에서는 민족어 또는 지역어에 근거한 문학 옹호가 중요하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그밖의 여러 이유에서 민족문학이라는 용어가 쓸모있다고 말하고 있다. ‘분단체제극복을 위한 문학’은, “남북분단이나 민족분열, 외세개입 등의 문제와 표면상 별 관련이 없는 소재를 다루더라도, 분단체제가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에 대해 새로운 깨우침을 주고 창조적 대응을 일깨우는 작품이면 되는 것”이라는 백낙청의 구절에 따르건대, 문학에 대한, 이를테면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내가 관찰한 바로는 지난 십수 년간 작가들은, 특히 젊은 세대의 작가들은 “오늘의 현실”을 “분단체제”와의 연관보다는 그와는 다른 다수의 연관 속에서 인식하고 탐구하는 방향으로 작품세계를 전개해왔다. 민족통일 같은 공적 대의에 봉사하기보다는 개인의 체험적 진실에 충실하려는 경향을 보였고, 민족문제보다 젠더문제, 환경문제, 세대문제 등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민족현실과의 싸움이나 한민족공동체의 비전이 문학적 성취를 촉진한다는 신념은 작가들 사이에서 크게 약화되었다.
백낙청 몇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하나는 분단체제의 개념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론의 성격에 대한 것, 그리고 세번째로 한민족공동체 얘기가 있어요. 먼저, 그냥 분단극복이 아니고 분단체제의 극복이라고 할 때는 우리가 단순히 통일만 하자는 게 아니라 지금 남과 북의 분단이 일정한 체제의 성격을 갖고 자리를 잡았는데 이 체제를 허물면서 이를 넘어서는, 분단체제보다 나은 체제를 만들자는 얘기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통일이라는 민족문제를 해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문제, 젠더문제, 환경문제, 이런 것들이 물론 완전히 해결은 안되지만 지금보다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전이 되고 해결에 다가가는 그런 식으로 분단을 철폐해가는 것을 분단체제의 극복이라고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민족현실에만 치중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은 단순한 ‘분단극복’ 문학에는 해당될지 몰라도 ‘분단체제극복’ 문학에는 해당이 안되지요.
다음으로,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자꾸 그런 식의 주문을 작가에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느냐는 문제인데, 우리가 평론을 할 때 일종의 화법으로 작가가 이랬어야 한다든지 하는 표현을 쓰긴 해요.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평론은 한 독자의 입장에서 동료 독자들과 대화하는 것이고, 거기에 작가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끼어들어와도 좋고 안 들어와도 그만이라고 봐요. 그래서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 이런저런 주문을 하는 것이 당장에 그 사람보고 그런 식으로 창작을 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들의 태도, 독자들의 의식, 문학 하는 풍토, 이것을 좀더 건강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독서경험을 개진하는 하나의 화법이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분단체제극복이건 뭐건 아무리 훌륭한 주제라 하더라도 그 주제의식을 작가에게 강요해서는 좋은 작품이 나오기 힘들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우리 시대에 무엇이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가 문학을 읽으면서도 그런 문제를 의식하면서 읽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 토론이 활발해지는 것은 문학풍토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차원에서 얘기하는 것이고요.
한민족공동체 문제는 적어도 내가 쓰는 용어로는, ‘통일 한반도 공동체’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한민족이라는 것은 에스닉(ethnic)한 개념이지요. 종족 개념으로서의 한민족은 한반도 주민의 전부도 아니지만 한반도에 국한되지도 않아요. 지금은 굉장히 많은 수가 한반도 바깥에 살고 있거든요. 여러 나라에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도 있고 영주권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그런 다양한 생활 속에서 한민족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 유지한다면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다른 곳에 있는 동족들과는 어떤 유대관계를 가질 것인가?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요즘 쓰는 용어로 하면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한 문제인데 그것이 내셔널(national)한 문제와 이율배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반도에서의 통일이라는 민족문제, 범박하게 말해 내셔널한 문제와 연계되어 있고, 그런 내셔널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한반도 내의 한민족을 포용하는 트랜스내셔널 네트워크의 문제예요. 통일문제가 한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듯이, 한민족공동체는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닌 겁니다. 그 두 가지 차원을 혼동하지 말아야지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평가는 공정한가
90년대 이후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에는 세계화 또는 지구화 상황에 대한 언급이 많다. 특히 “전지구적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의 ‘포스트모던 문화’”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양쪽 모두에 중대한 위협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전지구화 과정에서 일어난 트랜스내셔널한 문화유통이 문학으로부터 민족적·지역적 독자성을 앗아가고 사이비 국제주의를 만연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은 정확한 진단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문화에 대한 그의 비판은 반드시 공정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철학·미술·건축 등 어느 분야에 촛점을 맞춰 보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고, 특히 포스트모던 철학이 포함하는 서구 근대의 자기비판은 서구의 헤게모니적 지배 하에 근대를 구성한 우리 자신의 비판과 극복에 유효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백낙청 자신이 탈근대의 과제를 상정하고 있는만큼 포스트모던 문화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백낙청 물론이지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내가 때로는 아주 단호하게 언급한 적도 있지만, 또 어떤 때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대담하면서는 모더니즘 이후의 리얼리즘, 말하자면 모더니즘의 세례를 거친 리얼리즘이라는 뜻으로 포스트모던한 리얼리즘(post-Modern realism)이라는 표현을 쓴 적도 있지요(『창작과비평』 1990년 봄호, 285~86면-편집자). 포스트모던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조나 흐름을 내가 깡그리 비판하거나 배격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사상이 근대를 극복하려는 지향성을 가졌다는 뜻으로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데, 그렇지 않고 마치 모던의 시대 즉 근대는 끝나고 포스트모던 즉 근대이후의 시기가 이미 도래한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현대자본주의사회, 근대세계의 실상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행태라고 봐요. 나 자신이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말하고 있는데, 실은 근대극복이라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을 지향하는 것 아닙니까? 다만 지금이야말로 모던이 만개한 그런 시기라는 인식을 흐린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가 있고요.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구별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외국에서도 양자의 구별이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 본질상 모더니즘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는데, 모더니즘은 무조건 나쁘다는 전제라면 그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단호한’ 욕이 되겠지만, 모더니즘에도 좋은 것이 있고 우리가 배울 것도 있다는 가정 하에 받아들인다면 포스트모더니즘론자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새로움을 평가절하하는 효과는 있더라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깡그리 부정하는 발언은 아니지요.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대비판에 유용한 측면이 있다는 데는 나도 동감해요. 다만 지식인들 중에 자기가 근대를 비판하면 마치 근대가 극복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이 근대를 극복하려는 지향을 담은 담론이나 모색이라면 좋은데 실제로는 근대나 근대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그걸 ‘해체’한 것으로 극복이 다 됐다고 착각하고 ‘근대이후’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반론하고 싶은 거죠.
백낙청의 이론에서 근대 비판 또는 극복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문학양식에 대한 명칭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리얼리즘이다. 그의 이론에서 리얼리즘은 민족문학이 세계문학과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며 예술적 진리가 표출되는 탁월한 방식이다. 그의 리얼리즘론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문학을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예술기법의 유희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교조적인 정치이데올로기들의 지배로부터 구해내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가 말하는 리얼리즘은 전형성, 객관성, 당파성 같은 재래의 미학적 기준을 참조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 ‘문학 본연의 변증법’이라는 일반론적 가정, ‘지공무사(至公無私)’ 같은 도덕적 기율을 포함한다. 내가 소견이 좁은 까닭일까, 그렇게 포괄적이고 원융자재(圓融自在)한 리얼리즘론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서 내가 느끼곤 하는 불만의 하나는 리얼리즘이 시대를 초월하여 불변의 예술적 이상 또는 당위로 존재하는 듯하다는 점이다. 리얼리즘은 특수한 시대와 문화에서 유래한 특수한 문학관습이라는 관점에서 역사화하여 이해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리얼리즘 특유의 문학적 관습에 일어난 변화에 대한 관찰을 통해 그 한계와 가능성을 얘기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나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백낙청 사실 리얼리즘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골치 아파요.(웃음) 내가 말하는 리얼리즘이 사실주의와 다르다는 설명만 해도 매번 되풀이하려면 성가신데, 사실주의가 아닌 리얼리즘을 주장하는 많은 동료들 얘기하고도 또 좀 다르다고 설명하려면 얼마나 길고 복잡해져요? 황교수 말씀대로 차라리 “특수한 시대와 문화에서 유래한 특수한 문학관습”으로 정리해버리는 게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니까 19세기 한때 서구에서 성행했던 문예사조로서의 사실주의(寫實主義)로 이해하고 잊어버리는 거지요. 하지만 사실주의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홀히하는 문학에서의 원만한 현실인식과 현실대응 문제마저 잊어버릴 수는 없는 거지요. 부담이 따르고 부작용이 따르더라도 이런 문제제기를 할 무슨 용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도 ‘민족문학’과 마찬가지로 엄밀한 분석적 개념이라기보다 논쟁적 개념이에요. 논쟁의 주된 축을 사실주의 대 모더니즘, 또는 모더니즘 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설정하는 풍조에 맞서서, 그렇게 편하게만 가는 것이 문학의 큰길은 아니라고 일깨워주는 하나의 방편이지요. 그래서 이번 평론집에서도 리얼리즘 논의가 이런저런 변주를 겪으면서 계속 나오는데, 다만 나는 루카치처럼 리얼리즘을 주창하기보다 리얼리즘을 화두로 붙들고 궁굴리다가 때로는 놓아버리기도 하는 사람으로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어요.
고은 시의 평가를 둘러싼 긴장된 논쟁
이번 평론집에 실린 작가론, 작품론 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고은 시인에 관한 것들이다. 고은에 대한 논평이 다른 어느 작가, 시인에 대한 논평보다도 빈번할 뿐만 아니라 자상하다. 최근 우연한 계기로 고은의 『만인보』와 그밖의 시집들을 다시 읽다가 시인의 대가다운 호방한 수사력에 놀라는 한편으로 동어반복을 비롯한 매너리즘 증세에 실망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백낙청의 고은 평가가 다소 후하지 않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그의 고은론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자 그는 내 ‘만인보론’(「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 고은 『만인보』의 민중·민족주의 비판」, 『문학동네』 2004년 겨울호)에 이의를 제기했고, 이어 민주주의의 문제를 둘러싸고 잠시 긴장된 문답이 진행됐다.
백낙청 2004년이었나요, ‘만인보론’을 쓰신 것이? 민중-민족주의라는 표현을 쓰셨던데, 민중주의나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런저런 경계할 바가 있다는 지적은 나도 동의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선 고은 시에 접근하는 방법이, 오히려 황교수야말로 관념이나 이념을 앞세우는 것 같더군요.(웃음) 지금 말씀하신 대로 어떤 대목이 동어반복이고 어떤 시편이 태작이며 어떤 게 수작인지를 자상하게 비평해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초기 『만인보』를 주로 다루셨던데, 시인이 유년시절에 알던 시골사람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은 시들이다 보니, 우리 민족과 농촌민중 전래의 공동체적 삶을 예찬한다거나 또 배경이 일제시대기 때문에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점도 있게 마련인데, 거기서 이건 민중·민족주의적인 시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그다음에 민중·민족주의에는 이러저러한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틀을 다시 고은 시 전체에 적용해서 재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작품비평의 방법 차원에서는 그런 문제점을 느꼈고요.
논의 내용으로 보면, 민중·민족주의라고 하지만 사실은 민중과 민족이 다른 개념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결합될 때는 그 안에 묘한 긴장이 생겨서, 민중개념에 의해 민족개념이 해체되는 면도 있고 민족에 의해 추상적인 민중개념이 해체되는 면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냥 문제점이 있는 두 개의 개념이 합쳐져서 곱절로 문제가 많아졌다고 단순화한 것이 아닌가요?(웃음) 그리고 그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는 ‘현대 민주주의의 이상’을 말했는데, 나는 현대 민주주의가 뭐냐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봐요. 지배세력들이 물론 민중이라는 개념도 이용했고, 민족이라는 개념도 이용했고,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도 이용했지만, 동시에 ‘민주주의’니 ‘개인의 문화’니 하는 것들이야말로 현대 지배세력의 용어라고 봐요.
황종연 그런가요?
백낙청 아니, 부시(George W. Bush)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앞세워서 이라크 같은 데서 하는 짓을 보세요. 그러니까 그야말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해서 황교수가 민중이나 민족 개념에 들이대는 칼날이 사실은 황교수의 현대 민주주의라든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에도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검토 안된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을 황교수 자신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셨으면 싶어요.(웃음)
황종연 어떻게 보면 자유 같은 민주주의의 부속 개념을 검토하자는 것이 제 글의 취지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민주주의를 얘기하지만 그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한국문화에는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일제시대에서 군부독재에 이르는 현대사의 특성 때문에 민주주의를 공고히하는 데 불가결한 가치나 신념 같은 것이 정착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낙청 그것이 무어라고 생각하세요?
황종연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자유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이데올로기 가운데 상대적으로 한국 전통문화에 취약한 것이기도 하고 현대사를 통해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것이기도 하고요. 자유주의적 가치 중에서 자유, 개인의 자기결정의 자유라는 의미에서의 자유는 민주주의에서 기본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백낙청 자기결정의 자유를 지니는 주체는 가령 어떤 겁니까? 서양 전통에서 보면, 특히 서양 자유주의 전통에서 보면 단자적인 개인이거든요. 그런 개인이 인권, 자기결정권 등을 소유하는 주체로 설정되는데, 포스트모던을 얘기하는 분이 그런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되잖아요?
황종연 19세기적인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는 이유에서 강조한 것이고요.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생각하면서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개인의 아이덴티티가 복합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기 개인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계급, 세대, 성별……
백낙청 민족!(웃음)
황종연 네. 민족…… 빠뜨리지 않겠습니다.(웃음) 그런 여러 집합적 아이덴티티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개인의 자아가 성립하고 그런 맥락에서 민주주의의 주체인 민중 역시 복합적 아이덴티티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제가 하려던 주장이었습니다. 19세기적 의미의 자유주의 선언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글은 처음부터 『만인보』 작품론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민주화투쟁 속에서 성장한 민중·민족주의적 민중상을 찾아내고 그것을 현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재고하려는 목적에서 그 시집을 읽었습니다. 예단을 하고 도식을 세워 접근한 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민중상의 강점과 약점이 『만인보』에 드러나 있다는 것은 제겐 명백했습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새로운 과제에 비추어 과거에 만들어진 유력한 민중 표상을 반성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만인보』를 표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백낙청 내가 볼 때 80년대에 유행하던 민중담론에 대한 황교수의 정당한 비판의식과 반발이 초기 『만인보』에 담겨 있는 공동체적 정서랄까 이런 것을 확대해석하는 쪽으로 간 것 같아요. 그렇게 된 데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우리 역사 속에서 민족의 독립이나 자주 같은 것이 가졌던 절실성에 대한 인식이 좀 불충분한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우상에 대한 일종의 맹신이 가세한 것 아닌가 하는 거지요.
황종연 분단체제극복을 말씀하시지만 무엇을 위해 극복하려고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요? 민족자주의식도 중요하고 공동체의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분단체제 이후의 바람직한 사회를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선생님 말씀대로 민족주의는 분단체제극복운동에 유용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분단체제 이후 한반도사회 또는 한민족공동체의 모델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현대민주주의를 새로운 우상이라고 하시면 분단체체극복운동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낙청 만들고자 하는 사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민주주의죠. 그 점은 물론 나도 황교수와 같은 생각이에요. 그러나 무얼 가지고 민주주의라고 하느냐, 이걸 한번 제대로 따져보자는 거예요. 나는 소위 현대민주주의라는 것, 근대적인 민주주의, 그것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포스트모던의 정당한 요구에 어긋나는 것이고, 또 분단체제의 극복이 단지 통일만 하자는 것이 아니라 통일과정에서 우리가 정말 새롭고 더 나은 사회, 민주주의도 더 차원높은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일이라고 할 때, 민주주의 개념도 그 과정에서 재검토되고 쇄신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황종연 저는 정치철학은 잘 알지 못합니다만, 『만인보』의 민중상을 검토하면서 느낀 것은 민족 같은 한 아이덴티티가 민중 개념을 점유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 아이덴티티가 민중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면 당연히 다른 아이덴티티에 대한 억압이나 배제가 뒤따르게 되고 그러면 특정 아이덴티티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민중을 통제하는 결과가 됩니다. 이것은 민중이 스스로 통치한다는 의미의 민주주의와 거리가 멉니다. 우리의 역사나 현실과 괴리된 관념적인 얘기라고 하실까봐 두렵습니다만 현존하는 아이덴티티의 다수성을 충분히 인정하는 정치체제의 모색이 민주 정치와 문화에 관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 이후의 한반도사회나 한민족공동체를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서로 다른 정치체제 아래서,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공생하려면 다원주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민족공동체와 다원성의 문제를 논하다
백낙청 분단체제를 극복한 통일사회를 한반도에 건설하는 일과 전세계적인 다국적 한민족공동체의 설계와는 별개의 개념이라고 했는데, 어느 경우가 되건 다원성 또는 다양성 개념이 들어갑니다. 우선 통일 한반도의 국가형태가 굳이 단일형 국민국가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고, 또 그것은 다민족사회일 수밖에 없다고 봐요. 어차피 남한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잖아요? 통일을 하다가 폭삭 망한다면 몰라도 우리가 경제적으로 나아진다면 이주노동자들이 더 들어오는 사회가 될 것 아닙니까? 그들에 대해서 더 관용적인 사회가 되어야 할 텐데 그러다 보면 다민족사회가 되고, 오랫동안 갈라졌던 남북이 큰 무리 없이 합치려면 다민족적인 복합국가 형태가……
황종연 다원주의라는 말은 안 쓰시네요.(웃음)
백낙청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합시다. 아무튼 한반도사회는 그렇게 다민족화할 것이고, 다음에 범세계적인 멀티내셔널 내지 트랜스내셔널한 한민족공동체의 존재를 얘기하는 것은 인류사회의 다양성 내지는 다원성을 위해서 이런 종류의 에스닉 커뮤니티(ethnic community), 민족공동체도 필요하다는 인식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다원성, 다양성을 나는 절대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런데 다원주의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는 데 대해 내가 약간 경계심을 갖는 것은, 이것도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거든요. 지금 이 세계의 획일화 경향이라는 것은 다원주의를 능히 수용하는 획일화예요. 옛날식으로, 식민지를 만들어서 가령 프랑스가 프랑스의 이상을 그대로 주민들에게 가르치고 불어교육을 강제하고 그런 식의 지배가 아니고, 지금은 문화적인 다원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데 다만 끊임없는 자본축적에 부합되는 한에서만 수용되고 그렇지 않으면 탈락시키는 체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흔히 다원주의를 내걸고 이런 의미의 자본의 획일화나 전일적 지배에 영합하는 사이비 다원화가 아니라 진정한 다원화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다원주의라는 말을 그다지 즐겨 쓰지를 않지요.
황종연 민족공동체라는 관념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정의하고 실천을 모색하게 하는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현실을 잘못 알게 하는 역효과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떨까요? 지금 남한은 분단된 한반도 남쪽의 불완전한 국민국가이기도 하지만 써브엠파이어(sub-empire)라고 할까요? 하위제국이라고 할까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략 88년 올림픽 이후 한국은 과거 외세에 수탈을 당한 불행한 경험을 내세워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곤란한 국가가 됐습니다. 자본축적에 성공한 부유한 동아시아 국가 중 하나가 됐고, 해외투자가 활발한 나라가 됐고, 이어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의 종착지가 됐죠. 이 한국의 하위제국적 현실은 최근 소설에서도 주요 소재가 되고 있어요. 박범신의 『나마스테』는 트랜스내셔널한 시각에서 노동자의 고난과 투쟁을 다룬 작품이고, 천운영의 『잘 가라, 서커스』는 국경을 넘어선 노동이민을 배경으로 조선족 여자의 운명을 얘기한 것이고요. 분단체제론은 민족공동체의 이념을 강조한 나머지 하위제국의 현실 같은, 자본주의체제 아래 변화하는 한국의 현실을 혹시 경시하게 만들지는 않을까요?
백낙청 외세에 의해 분단된 약소민족, 이런 식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대한민국이 그동안 얼마나 커졌고 나쁜 짓을 할 능력도 얼마나 대단해졌는가에 대한 인식이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이죠? 동감이에요. 하지만 분단체제론은 그런 식의 약소민족론은 아니에요.(웃음) 다만 아류제국주의 비슷한 국가로 성장한 현실도 우리가 분단체제론의 시각에서 인식하고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분단이 어떤 면에서 경제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했는가? 그러면서도 그 경제성장이 왜곡되고, 바로 얼마 전까지 남의 식민지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아무런 의식도 없이 해외에 나가 부당한 착취를 하고 어글리 코리안 노릇을 하는 이 작태는 분단과 과연 무관한 것인가? 그런 것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한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나서더라도 상당히 저급하고 한정된 수준의 하위제국주의 이상으로 가기 힘든 것은 나라가 작아서만이 아니라 남한 자본주의가 지닌 태생적인 한계와도 관계가 있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분단체제론은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를 간과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분단체제론은 같은 민족끼리만 모여 살자는 민족주의적 통일론이 아니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기본적인 문제들이 한반도에서 작동하는 양상을 고찰할 때 분단이라는 요소를 빼고 볼 수 없다는 얘기거든요. 분단이 기본모순이고 자본주의의 문제들은 부차적이라는 얘기가 전혀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박범신이나 천운영, 또는 김재영 같은 우리 작가들이 뒤늦게나마 이주노동자 문제에 눈을 돌려서 작품을 쓰고 있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활력을 반영하는 것이고 분단체제극복에 크게 이바지하는 길이라고 봐요.
북녘에 대한 남녘의 책임을 되새겨야 할 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지만, 북녘 주민의 실상을 분단체제론적인 관점에서 인식하고 그려내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동포가 저렇게 못사는데 불쌍하다든가, 저게 다 미국 때문이니까 미국을 쫓아내자든가 이런 단순논리에 입각한 문학이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이 아니란 말이에요. 물론 동포니까 통일하자, 동포니까 도와주자는 그런 면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 주민의 대부분이 동족인 것도 사실이고 동족으로 보면 이런저런 감정과 사고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것도 사실인데, 기본적으로는 동포도 동포인 거지만 같은 분단체제 아래 살고 있다는 동류의식과 그에 따른 책임의식이 더 중요하다는 거지요. 지금 북측에 사는 주민들에 대해서 깊은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주로 동포애 아니면 추상수준이 훨씬 높은 인류애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어요. 물론 동포애도 중요하고 보편적인 인류애도 중요하지만, 남과 북이라는 매우 다른 사회체제 속에 살지만 실은 동일한 분단체제 속에서 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체제 아래 살고 있는 만큼의 연대책임이 있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우리 작가들이나 일반시민들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인식의 전진이라고 봐요. 지난 2005년 7월에 남쪽의 작가들이 대규모로 북녘에 가서 북쪽 작가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이렇게 왕래하다 보면 자연히 그런 인식을 하는 작가들이 많이 나오리라고 봐요. 우선은 다녀와서 동포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혹은 감격해하고 혹은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북쪽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훨씬 냉정하게 비판하기도 했어요. 나는 동포의식도 좋고 냉정한 비판도 다 좋은데, 비판할 걸 비판하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전혀 다른 남들을 보듯 하지 말고 나도 연루되어 있고 나도 그 속에 살고 있는 동일한 분단체제의 다른 한구석, 내가 사는 곳과 판이하지만 크게 보아 같은 판국의 다른 한구석을 이루는 사회가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럴 경우 내가 살고 있는 이쪽에 그런 문제가 없다고 해서 이게 남의 얘기인가? 저쪽의 그런 현실이 남쪽에서 벌어지는 남쪽 나름의 문제들과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이 분단체제 속에서 살면서 어느새 거기 길들여져 남쪽 사회가 옹근 전부라고 생각하고, 분단체제극복이라는 과제를 외면한 채 세계화의 흐름에 편승해서 잘살아보려는 타성과 지금 우리가 북에 대해 개탄하는 현실이 과연 무관한 것인가? 이런 식의 고민을 좀더 하자는 거예요.
남한사람들에게 동일한 분단체제 아래 살고 있는 만큼의 연대책임이 있다는 말은 그에게서 처음 듣는 발언이 아니었음에도, 그리고 그의 발언이 준비된 웅변이 전혀 아니었음에도 감동적이었다. 지난해 7월 남한 민족문학작가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행운을 얻은 나는 그가 말한 ‘감격파’와 ‘비판파’ 양쪽 사이를 줏대없이 오가긴 했어도 나의 삶이 그들의 삶과 ‘연루’되어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했다. 남쪽 사람들이 연대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문득,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굶어죽고 있는 것은 프랑스인의 책임이라고 힘주어 말한 생전의 싸르트르를 떠올리게 한다. 백낙청이 요구한 ‘고민’은 지성적 분별의 문제라기보다는 도덕적 용기의 문제이다. 그것은 좁은 삶의 지평 안에 개인 자신을 가둠으로써 누리는 편안함, 확실함, 온전함의 환상을 버리고 개인의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의 고통이 따르는 윤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문제이다. 그가 ‘지공무사’라는 말로 가리키는 것 중 하나도 어쩌면 이것일지 모른다. 한 개인이 일상적 경험의 범위를 벗어나는 ‘연루’의식, ‘연대’감정을 가지기란 보통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의 동서고금이 알려주는 것은 그러한 도덕적 용기 없이 위대한 문학적 업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대한 업적이라는 말을 하니 백낙청이 꼼꼼한 작품읽기를 강조하고 엄정한 작품평가를 강조하는 비평가라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다. 새 평론집 중 「비평과 비평가에 관한 단상」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비평, 그리고 황석영의 『손님』론을 비롯한 작품론에서 백낙청이 하고 있는 비평은 그의 아랫세대 평론가들이 같은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다. 그의 비평은 창작 다음에 오는 지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철학적 사유와 비평적 사유의 혼동을 경계하고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안목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이것은 생각해보면 저널리즘의 요구와 맞아떨어지는, 대학 중심의 문학연구에서는 잊혀져버린 비평의 주요 요건이다. 저널리즘 비평가는 보통독자들과 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작품에 대해 논평하고 보통독자들에게 공정하게 보이는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백낙청도 지적하듯이, 그런 의미에서의 훌륭한 비평가를 낳기에 그리 유리하지 않다. 빈곤한 문학유산, 허약한 문학저널리즘, 가난한 보통문화(common culture), 그리고 그밖의 여러 이유에서 보통독자의 문학교양을 대표한다고 누구나 공감하고 동의할 만한 비평의 대가가 출현하기 어렵다. 좋은 작품과 좋지 않은 작품을 가리는 비평가 개인의 기준은 오히려 독단적인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비평가는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백낙청 독단적이라는 말을 점점 더 많이 듣게 되겠지만 그럴수록 최대한으로 공정한 평가를 하려는 노력은 더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 아랫세대의 비평가와 다르다는 말을 하셨지만 젊은 세대 중에서도 가령 황교수 같은 이는 그래도 나와 비평관이 꽤 통하는 사람 같은데……(웃음) 몇년 전에 『비루한 것의 카니발』이라는 평론집을 내셨잖아요? 그 머릿글에서도 ‘문학작품 자체, 문학 자체’를 강조했고 “문학비평의 본분이 문학작품에 의해 이루어진 발견을 알아보고 명명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내 생각과 비슷하다고 공감을 했어요. 다만 거기에 토를 달자면, 나는 문학행위의 두 축을 작가와 비평가로 설정하기보다, 작가와 독자 즉 문학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작품을 읽고 수용하는 사람, 이것이 기본축이라고 보는 입장이에요. 「단상」에도 썼지만, 비평가는 기본적으로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발언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를 발견해서 쓰는 한은 넓은 의미의 창작자가 되는 거죠. 어떻게 보면 양다리 걸친 존재인데 기본적으로는 독자 쪽이죠. 일반독자가 모르는 어떤 ‘객관적 잣대’를 가졌다든가 특별한 이론을 알아서 적용하는 전문가가 아니란 말이지요. 나보고 이론비평을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지만, 사실 나는 일반독자의 작품읽기와 무관한 이론을 끌어다가 작품에 대해 ‘썰을 푸는’ 식의 요즘 유행하는 비평은 딱 질색이에요. 그런데 내가 지금 문학의 양대축의 하나가 비평가라기보다 독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비평가의 평가행위라는 것이 평범한 독자도 작품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가치판단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하려는 겁니다. 지금 내가 읽는 이 작품이 좋다 나쁘다, 어느 것보다 더 좋다거나 덜 좋다, 또 같은 작품에서도 이 대목이 더 좋다 하는 판단을 본능적으로 하면서 읽는 것이 독서경험이거든요. 인간의 자연적인 심리현상이에요.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가치판단인데, 이것을 남보다 더 많은 훈련, 물론 독서훈련이지만 독서뿐 아니라 여러가지 개인적인 수련, 마음공부와 지식공부를 겸한 수련을 통해 그때그때 일어나는 판단이 조금이라도 더 타당하고 동료독자들에게 설득력이 있게 하고자 노력해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독자가 비평가인 거지요. 그러니까 비평가가 말하는 객관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자연과학에서와 같은 외부적인 기준이 아니죠. 어떤 고정된 잣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내재적인 가치판단을 개인의 수련과 다른 독자들하고 소통하는 훈련을 통해 순화하고 설득력을 넓혀가는 그런 의미에서의 객관성이지요. 이 대목에서 ‘문학주의자’로서의 내 본색이 드러나는 건지 모르겠는데(웃음), 나는 비평가가 추구하는 그런 어정쩡한 객관성이야말로 진짜 높은 차원의 객관성이고 과학에서 말하는 객관성이라는 것은 사실 여기서 어떤 일면을 추상해내서 그런 수련이 없는 사람도 아무데나 적용할 수 있게 만든 인위적 잣대라고 보고 있어요.
문학에 관한 백낙청의 글을 읽다 보면 ‘문학의 성취’ ‘최량의 작품’ ‘최고의 경지’ 같은 말이나 바로 그 작품, 그 성취, 그 경지를 알아보기 위한 마음의 수련을 강조하는 말을 가끔 만나게 된다. 최고의 작품을 알아보는 훈련된 마음이라는 그 비평가상을 보면 내가 그의 전공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인지 몰라도 영문학비평의 한 전통,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에서 F.R. 리비스(Leavis)에 이르는 비평전통이 생각난다. 백낙청이 ‘비전문적인 전문성’이라는, 음미할 만한 역설을 택해 지칭하는 비평의 특성, 그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내 소견으로는 그 비평전통이다. 이 전통 속에 있는 비평가들은 고대 및 현대의 출중한 작품들의 핵심을, 이른바 정전을 확인하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그 정전을 기준으로 엄격하게 평가적인 비평을 추구한다. 엄정한 평가의 의무를 강조하는 백낙청의 생각은 그런 정전중심주의와 통하는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백낙청 영문학에서 보면 아놀드나 T.S. 엘리어트(Eliot)나 F.R. 리비스 모두 시를 시로 대하지 다른 무엇으로 대하지 말자는 점에서 일치하고 하나의 전통을 이루고 있어요. 요즘은 많이 약화된 전통이지요. 영문학도로서, 그리고 한사람의 문학도로서 내가 이 낡은 전통에 집착하는 사람인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정전을 규범화해서 고정시키는 경향과는 분명히 구별해야 해요. 아놀드도 그렇고 엘리어트도 그렇고 리비스도 그렇고, 당대의 새로운 감수성을 갖고 종래의 문학지도를 새로 그려낸 사람들이거든요. 기존의 정전체계를 파괴한 사람들이죠. 그중에 아놀드는 낭만주의 세대가 이룩한 전환을 계승하고 정리했다는 점에서 혁신성이 덜한 편이지만요. 그런데 요즘들 말하는 정전파괴는 이게 막가기 시작하면 고전적이라거나 위대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이 애당초 차이가 없다는 논리로까지 발전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이제까지 고전으로 알려져온 이러저러한 작품에 대해서는 승복하지 않고 오히려 이러이러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하고 내세우며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노력한 사람들이 아놀드며 리비스지요. 이건 비평가의 기본임무라고 봅니다. 자기가 좋다고 믿는 작품,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인정을 받고, 그것도 되도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래오래 인정받기를 바라서, 관권이나 금력을 동원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비평활동을 통해서 그런 인정을 얻어내고자 하는 것은 비평가라면 당연한 태도라는 거지요. 이미 고전으로 인정된 몇몇 작품만 모시는 답답한 정통주의랄까 정전주의와 혼동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백낙청이 읽은 김애란과 박민규
인터뷰가 기성 정전체계에 구애되지 않은 비평활동이라는 문제에까지 미친만큼 동시대 문학작품에 관한 이야기, 특히 민족문학이나 리얼리즘의 전통적 기준으로 보면 논란이 많을지 모를, 그러나 흥미롭게도 『창비』와 인연이 깊은 신인작가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청하는 것으로 질문을 끝내고 싶었다. 그 신인작가는 그가 최근 문학현장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을 주었다고 말한 작가 중 두 사람, 김애란과 박민규이다.
백낙청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서 받은 인상을 요약하면, 김애란의 감수성이 참신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어떨 때는 기발한데다 화법이 다양해서 그렇지, 실제로 서사문법은 오히려 고전적이랄 수 있겠다는 거였어요. 흔히 말하는 사실주의적인 규율이라는 면에서도, 그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고 박민규 같은 작가는 그것을 과감하게 파괴하지만, 김애란의 경우는 그 점에서도 특별히 이탈적이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작중 화자나 주인공이 기발한 상상을 한다고 해서 그 소설 자체가 판타지 소설이나 탈사실주의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표제작 「달려라, 아비」에서 화자가 어머니 뱃속에서 이런저런 경험을 했노라고 말하는 건 하나의 화법이고, 오히려 사실주의 규율에 분명히 위배되는 작품으로는 데뷔작 「노크하지 않는 집」을 꼽겠어요. 뒷부분에 가면 주인공이 이 사람 저 사람의 방에 몰래 들어가보는데 방에 대한 묘사가 한 자도 안 틀리게 똑같이 나오지요. 그 집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획일화된 익명성의 세계인지를 부각시키는 수법이겠지요. 하지만 그러다 보니까 잠시 들여다본 방에 대한 묘사로는 안 어울리는 표현들이 나와요. 서랍 중 한 칸은 ‘언제나’ 어떻다느니, 휴대폰 충전기가 ‘항상’ 충전돼 있다느니 하는 식이지요. 자기 방과 똑같은 방들이라는 점을 이런 양식화된 표현으로 제시하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첫 작품의 미숙성이라 해야 할지 아무튼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대목이고요. 그밖의 작품들은 모두 기발한 상상과 표현 들로 넘치지만, 우리가 평론을 할 때 김애란의 서사문법이 다분히 전통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갖는 새로움이 어디서 연유하며 어떻게 달성되는가를 따져서 그렇지 않은 동시대 또는 동년배 작가들과 구별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내가 보기에 김애란 소설에서 받게 되는 발랄한 인상은 유머감각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유머감각은 물론 김애란 특유의 자질이 아니지만 김애란의 경우 비범한 수준이다. 아버지를 다룬 작품들을 보면 특히 그렇다. 이른바 대서사라는 것이 퇴장한 이후 한국소설은 오이디푸스 씨나리오 또는 가족 로망스를 모델로 삼아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거기에서 나온 아버지 이야기는 대체로 권력 또는 권위와의 싸움을 둘러싼 엄숙함이나 비장함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들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든 딸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든. 반면에 김애란 소설은 오이디푸스 씨나리오의 유혹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를 희극적으로 이야기한다. 예컨대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딸의 자취방에 묵고 있는 무능한 아버지라는 점에서 신경숙의 초기작 「어떤 실종」에 나오는 아버지와 비슷한데 신경숙 작품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은, 뭐랄까 처연한 엘레지의 분위기를 전혀 풍기지 않는다. 오히려 동화 속의 인물처럼 순진하고 왜소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 동화적 명랑성의 한 극치가 달리는 아버지에게 썬글라스를 끼워주는 감각이나 딸의 출생을 가져온 육체적 결합을 해변의 불꽃놀이로 치환하는 감각에 들어 있다. 백낙청의 올바른 지적대로 김애란 소설은 다분히 고전적인 서사문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뭔가 생소한 도덕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백낙청 박민규의 경우는 사실주의적인 규율을 대대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파괴하는 작가인데, 그러나 흔히 말하는 환상소설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환상소설이라고 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세계를 설정하면서도 그 세계 나름의 법칙을 갖고 움직이는 환상적인 사건과 행동 들이 벌어지는데 박민규의 소설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이런 황당한 얘기를 했다가 저런 황당한 얘기를 했다가 자기 멋대로거든요. 그것은 환상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 현실에 발을 딛고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하나의 레토릭(rhetoric)이라고 봐요. 가령 「코리언 스텐더즈」 같은 작품은 외계인이 등장하지만 알레고리적 수법을 쓴 리얼리즘 소설, 심지어 ‘농촌문학’이라고까지 부를 만한 그런 소설이에요.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비유가 현란해서 그렇지 사실주의에서 이탈했다고 볼 필요조차 없는 작품이고요. 물론 카스테라, 너구리, 기린, 대왕오징어 등등이 말하자면 모두 ‘환상’에 해당하지만, 그 환상적 요인이 각기 활용되는 방식이 다르고 작중의 기능이 다른 점을 좀 자상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에요. 그런 요소 외에도 박민규의 어법과 문장에 대해서 검토해볼 여지가 많다고 봅니다. 내 경험으로는 박민규의 소설을 대충대충 읽기로 치면 즐겁고 부담없이 넘어가지만 일단 내용에 관심이 끌려서 완전히 흡수하면서 읽으려면 굉장히 힘들어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품들이거든요. 그렇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쓰는 비유가 그냥 하나의 기발한 비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비유가 하나 등장하면 그걸 계속 변형시키면서 우려먹거든요. 계속 발전하는 비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작품의 짜임새를 확보해주지요. 사실 이건 시인이 쓰는 기법이에요. 시라는 것이 아무래도 지면의 분량에 비해 노동강도가 높은 독서행위를 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박민규의 경우도 그런 언어적 표현의 연쇄를 통해서 작품이 짜임새를 갖게 되는데, 그런 것을 따라가려면 노동강도가 상당히 높죠.(웃음)
박민규 소설처럼 사실주의의 기율을 고의로 저버린 작품을 흥미와 애정을 가지고 읽고 있는, 더욱이 거기서 시적 기법을 발견하는 백낙청의 독법이 내겐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다. 비평가로서 그의 감각이 내가 평소 짐작하던 것 이상으로 유연하고 활달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민규 소설에 대해서는 그가 나보다 훨씬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박민규 소설은, 특히 단편은 양식상으로 보면 한마디로 우화가 아닐까? 어떤 현실의 그럴듯한 가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력에서 자유로운, 그러면서 재미와 교훈을 주려고 재치를 발휘한 이야기가 그의 단편의 특징 아닐까? 어떤 경우 박민규 단편은 내게 대중소비사회의 이솝우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백낙청에게 박민규 소설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백낙청 재미라는 것은 좀 너무 막연한 얘기 같군요. 이런 재미를 달성하는 여러가지 기법이 있겠는데 그중의 하나가 지금 말한 것과 같은 언어의 시적인 사용에 따른 재미일 테고, 그다음에 교훈이라는 말을 쓰셨는데…… 박민규가 들으면 ‘조까라, 마이싱이다’ 할지도 모르겠어요(웃음)(박민규 「조까라, 마이싱이다」, 『대산문화』 2004년 여름-편집자). 무슨 정리된 교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온갖 어설픈 교훈이 난무하는 세계에 대한 반감, 특히 카스테라 그러면 ‘가게에서 파는 거잖아?’, 대왕오징어 그러면 ‘사실 그건 15미터짜리고 150미터는 실수였다’고 하면서 오징어들이 보기에도 한심한 짓거리를 하며 사는 인간들, 이런 데 대한 거부감과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지구가 발하는 개복치의 산란(産卵)과 같은 빛을 발견하는 것-이런 것들을 교훈이라 부를 수야 있겠지만 ‘교훈’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군요. 이솝우화의 우화적인 기법과는 많이 다르지 않나요? 나는 아무래도 시적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하다고 봐요. 좋은 시에서와 같은 굉장한 언어의 에너지가 있어요. 그 에너지가 환상을 낳기도 하고 그걸 통해 현실에 대한 일깨움을 주기도 하고…… 이런 경험 자체가 교훈이라면 교훈이지만, 이솝우화는 줄거리를 요약해보면 그 교훈이 뭔지 추출이 되는데, 박민규 소설은 요약하기가 참 어려워요. 사실적인 이야기든 또는 우화적인 이야기든 이야기 위주의 구성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실 박민규의 소설은 중간에 덮었다가 다시 읽으려고 하면 힘들어요.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해요. 이것도 시의 특성과 통하지요. 그의 장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도 이런 기법이 살아 있지요. 이번에 『카스테라』를 읽으면서 훌륭한 작가임을 재확인했고 내 나름으로 ‘한국문학의 보람’을 느꼈지요.
『창비』가 창간 40주년을 맞이한 싯점에 백낙청으로부터 ‘한국문학의 보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유쾌하고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는 『창비』가 문예지와 정론지를 겸하는 데서 오는 제약을 말하지만 그 겸업은 내가 보기에는 문예지로서 『창비』의 약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강점이다. 문학은 그 외부를 향해 열려 있지 않으면 문학다운 문학으로 존속하지 못한다. 문학은 그 외부와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을 통해 낡은 규범과 관습으로부터 탈피하고 생동하는 인간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자본주의 세계체제 하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생각하는 지혜로운 실천가, 쟁점이 놓여 있는 대화적 맥락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정연하게 주장을 펼쳐가는 노련한 논쟁가, 그리고 작품기법에 자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작품평가의 공정성을 추구하는 정격(正格) 비평가를 만났다. 40년의 유례없는 역사를 이룩한 『창비』의 지면이 앞으로도 다른 모든 문예지의 거울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