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민족문학론] 창비 민족문학론의 전개와 새로운 도약

*이 글은 『한결같되 날로 새롭게: 창비 50년사』(창비 2006)에 수록되었습니다―편집자 주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평론집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역서 『지식의 불확실성』 등이 있음.

 

무릇 개념이란 외연(外延)을 잡기 나름이지만 엄밀해야 한다. ‘민족문학’도 마찬가지다. 길게 잡는다면 우리의 민족문학은 ‘서세동점’의 물결이 점점 거세지면서 민중의 자각이 싹트기 시작한 17~18세기로도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창작과비평』이 발신해온 민족문학을 중심으로 본다면 일단 식민지시대에 발생하여 분단시대의 자장 속에서 성장한 문학과 좀더 직접적인 연관성을 띤다.

물론 그 연관성도 세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일제시대 특히 1920년대 ‘조선심(朝鮮心)’으로서의 민족문학과 해방 직후에 분출된 민족문학, 그리고 이후 분단시대의 민족문학이 동일한 함의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문학이라는 용어도 일제의 사상 탄압과 검열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시대적 제약을 떠나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밝히기 어렵다. 가령 염상섭(廉想涉, 1897~1963)의 발언은 그런 제약을 확인해주는 바 있다. “민족문학으로 말하면 모든 문학이 ‘개성’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음과 같이 모든 문학은 또한 그 민족적 개성을 포유(包有)하고 있다는 점으로 생각하여 모든 문학은 결국에 민족문학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1) 이같은 보편주의적 발언이 나온 시점, 즉 1935년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을 수 있는 문학 개념이 봉쇄되던 식민 치하임을 상기해야 마땅하다.

이것이 일제시대 민족문학에 대한 유일무이한 정의는 아니고 그때 이미 민족문학은 계급문학과 긴장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민족문학은 계급과 민족을 대립시키는 도식성과 일제 지배계급의 분쇄정책에 의해 파산한 계급문학과는 다른 행로를 걸었다. 민족문학은 “해방 직후 임화 등에 의해 최초의 논리적인 문학이념으로의 정식화가 이뤄”진바,2) 동족상잔에 이어 반공체제가 구축된 1950년대에조차 그 명맥이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물론 50년대에는 우파 문인들이 민족문학을 반공의 이념적 구실로 악용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지만, 1960년 4・19혁명을 거치면서 지식인들과 민중이 새롭게 각성하고 김수영(金洙暎, 1921~68)과 신동엽(申東曄, 1930~69) 같은 걸출한 작가들이 그같은 각성을 탁월하게 작품으로 구현하기 시작하면서 민족문학도 담론과 작품 창작 양면에서 비약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 비약에 주목할수록 식민지시대와 해방 직후의 민족문학, 분단시대의 민족문학 사이에 어떤 단절과 연속성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유신체제가 공고화된 70년대 들어 반외세 의식과 민중의 호응이 가세한 민족문학이 이전 시대와 구분되는 결정적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는 데만은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 계기 중 하나가 계간 『창작과비평』의 창간(1966)인바, 7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민족문학은 민족적 위기의식의 한 표현인 동시에 엄연한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백낙청의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1974)와 염무웅의 「식민지 문학관의 극복문제: 민족문학관의 시론적 모색」(1978)를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은 민족문학을 변화무쌍한 현실에 따라 변천하는 역사적 개념으로 설정하면서 현실참여 의지를 다지는 것이 문학 본연의 길과 행복하게 합치된다는 점을 자신있게 천명한 것이다. 그같은 자신감은 작품 생산으로 뒷받침되었으니, 최원식이 「민족문학론의 반성과 전망」(1982)에서 정리한 대로 70년대는 그동안 다양한 개념과 문맥에서 사용되어온 민족문학이 가치지향성을 띠고 ‘정립’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60년대의 참여문학론, 시민문학론, 농민문학론, 리얼리즘 문학론이 수렴되면서 그 구심점으로 민족문학론이 모색된 것이다.

그 점을 주목한 임홍배는 백낙청과 염무웅의 비평을 중심에 놓고 60년대 이후 민족문학의 시대적 흐름과 변모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어림잡아 『창비』 창간(1966)을 전후한 무렵부터 70년대까지를 민족문학론의 형성기 내지 정립기로 본다면, 80년대에는 민족문학의 민중적 지향이 뚜렷해지면서 특히 87년 이후로는 민족문학 전체를 두고 볼 때 일시적으로 민족문학론의 내적 분화양상이 두드러지기도 하며, 90년대에 들어서는 백낙청・염무웅의 글에서도 민족문학의 위기가 진지하게 거론될 만큼 이전의 두 시기가 갖는 본질적 연속성과도 구별되는 새로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 시기의 새로움에 대한 백낙청・염무웅의 대응논리는 이미 7, 80년대의 비평적 모색에서 어느정도 예비되어왔다고 생각된다.3)

임홍배의 정리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80년대 “민족문학의 민중적 지향”도 양면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민중적 지향을 강조하는 급진 담론의 등장은 기존 민족문학의 지평을—소재나 주제, 작가의 신원 등에서—대대적으로 확장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70년대 민족문학을 소시민문학으로 낙인찍는 과도한 주장을 펼침으로써 민족문학의 심화와 발전을 이루는 데 일정한 제약을 초래하기도 했다.

물론 일제 카프문학을 발전시키려는 계급문학론자들조차 자신의 지향성을 민중적 민족문학으로 규정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민족은 여전히 일종의 상수(常數)였다. 최소한 그런 면에서는 계급문학도 민족문학의 발전에 더없는 자극이자 다그침이었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산업예비군을 양산한 70년대의 압축적 근대화와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속에서 움튼 계급문학이 70년대의 민족문학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기왕에 확대된 민족문학의 지평을 제대로 담아내지는 못했다. 게다가 주로 민족문학의 ‘주체’를 두고 벌어진 그같은 논쟁은 계간 『창비』가 신군부에 의해 폐간되면서 더 격화된 면이 있었다. 특히 “87년 이후로는 민족문학 전체를 두고 볼 때 일시적으로 민족문학론의 내적 분화양상이 두드러”졌기에 그 분화양상도 좀더 섬세하게 파악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70년대 이후 민족문학론의 분화와 논쟁 양상을 좀더 엄밀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박정희시대와 신군부시대로 나뉘는 70년대와 80년대를 본질적으로 단절보다는—지그재그의 궤적으로나마—발전적 연속성이 강한 하나의 시기로 묶어 보는 시각이 요구된다. 민족문학이 “엄격한 의미에서 1970년대로 끝났다”는 진단보다는 “민족문학의 핵심은 계승되고 있”었다는 판단에4)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처럼 80년대를 민족문학이 더욱 발전한 시기로 파악하면서 전 시대의 알맹이가 80년대로 이월되는 과정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계사적 시야가 필요하다. 돌이켜보건대 민족문학의 논쟁적 성격이 강렬하게 분출되고 창작 이념으로서 작가들에게도 가장 생산적인 자극으로 작용한 때는 70년대라는 평가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도 세계사의 현실이 관철되고 있었다. 가령 70년대는 베트남전으로 표상되는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이 뜻깊은 결실을 본 시대였고, 민족문학의 발흥과 힘찬 전진도 그 기운을 알게 모르게 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70년대 벽두에 베트남 참전을 체험한 황석영 같은 작가에 의해 「객지」(1971)와 「한씨연대기」(1972) 같은 문제작이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냉전도 아니고 열전도 아닌 상태가 지속된—북에서는 유일체제가, 남에서는 유신체제가 합작하면서 하나의 체제를 더 확고하게 형성한—한반도 상황에서는 베트남전 종전(1975. 4. 30)과 같은 극적인 사건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훗날 ‘87년체제’로 명명된 시대에 들어 민족문학은 민족해방노선(NL)과 민중해방노선(PD)의 발전적 결합을 지향하는 동시에 ‘소시민’으로 대변되는 민중들과 중산층의 미세한 삶의 결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지 못하고서는 문학다운 문학으로 자립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것이다.5) 작품과 비평 차원에서 그런 종합을 어느정도 이룩했기에 70, 80년대에 다른 어떤 조직이나 단체보다 창비가 민족문학(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자평할 수 있다. 70년대 민족문학을 두고 ‘소시민’이라는 딱지를 남발한 80년대 소장비평가들의 급진성은 일제시대 카프의 관념성을 제대로 떨치지 못한 면이 많았고, 그런 까닭에 실제 삶을 다루는 당대의 다양한 문학 흐름을 읽는 실천적인 비평의 몫을 다하지도 못한 것이다.

게다가 그런 급진성은 87년 6월항쟁을 기점으로 더욱 일면적인 노동계급 중심주의로 치닫기도 했다. 그렇다면 민중적 민족문학을 지향한 (소장)비평가들이 87년 6월 시민혁명이 열어놓은 창조적 공간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80년대 민족문학의 행보도 무척이나 더딜 수밖에 없었지만, 더딘 행보 속에서나마 민족문학은 6월 시민혁명의 성취를 이어받았다. 그 과정에서 『창비』의 복간(1987)이 이루어진다. 그로써 창비는 세기말인 90년대를 내다보면서 민족문학의 ‘새 단계’를 구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민족문학의 새 단계라는 것은 그 함의가 극도로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민족문학을 둘러싼 대내 및 대외의 지정학적 조건들이 맞물려 작용하면서 민족문학의 고투도 진지전의 형식을 띨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대내적으로는 6월항쟁의 성취가 ‘온전한 민주화과정’으로 접어들지 못하고 노태우와 민정당으로 표상되는 개량된 수구세력과의 밀고 당기는 기나긴 여정으로 이어졌다. 대외적으로는 베를린 장벽의 철폐(1989)와 독일 통일(1990), 그 이듬해 쏘비에뜨연방의 해체가 국내 개혁세력의 지지부진한 전진 및 분열과 맞물리면서 문학의 상황도 착잡해진다. 80년대에 민족문학의 깃발을 급진화했던 논자들이 ‘변신과 탈주’를 시도함으로써 상황이 더 꼬여간 면도 있었다. 다른 한편 기왕에 축적해놓은 민족문학의 알맹이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이 더 깊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90년대 들어 본격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대적인 공세는 또다른 성격의 도전이었다. 민족과 민중 개념을 세계화시대의 실정에 맞게 설정하지 않고서는 그런 공세를 감당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민족문학의 기사회생도 세기말의 화두가 되어야 했다.

이런 복합적인 위기에 맞서 창비의 민족문학은 동서냉전의 결정적 해체를 초래한 세계체제의 거대한 전환이 한반도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예의주시하면서 안팎으로 전열을 다시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는 군부독재라는 자명했던 적의 실체가 무대에서 퇴장함으로써 벌어진 위기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역사적 현실이 엄존했음을 뜻한다. 즉 비교적 구심점이 강력했던 70년대 민족문학은 87년 이후 안팎의 대대적인 도전에 직면했으니, (87년 이후 국면에서 잠시 위세를 떨쳤던) 노동해방문학의 파괴적 원심성을 지혜롭게 견제해야 하는 과제는 말할 것도 없이, 민족을 상대화하면서도 역사적 의의가 달라진 상황에 처한 자신을 계승해야 하는 곡예가 더없는 도전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실제로 백낙청은 분단체제의 근본적 제약이 문학에 가할 수 있는 한계를 의식하면서 90년대초에 이렇게 논한 바 있다.

우리의 민족문학운동이 그런 악순환에 빠져들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고은, 신경림 같은 우리시대 최고 수준의 시인들로부터 김영현・방현석・김하기 등 90년대초 작단의 가장 유망한 신예에 이르기까지, 민족문학의 대의에 동참하는 창조적 성과들을 우리는 여전히 자랑할 수 있는 처지다. 하지만 민족민주운동 전체의 새로운 위기는 문학에서도 엄연하다. 민중적인 민족문학을 외치면서도 다수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문학, 가장 민족적이기에 가장 떳떳한 세계문학이라고 내세우면서도 민족언어와 민족적 생활 고유의 보람을 살리지도 못하고 국제적인 흐름에도 무감각한 문학—이런 것의 대명사가 ‘민족문학’이 되어버릴 위험이 전혀 없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6)

백낙청의 이런 우려가 단순한 기우만은 아니었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벌어졌던 국내외의 대대적인 지각변동 속에서 민족문학의 좌표를 80년대만큼 확실하게 잡고 나아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87년 시민항쟁이 성공적으로 완수된 이후 백낙청은 조심스럽게 ‘민족문학의 새 단계’를—이는 그의 네번째 평론집(1990) 제목이기도 하다—제시했지만 실제로 펼쳐진 새 단계의 양상은 복잡다단했다. 이 새로운 단계는 87년 6월항쟁의 성과를 ‘작품’으로 반영하는 민족문학의 새로운 도약 가능성을 가리키는데, 그런 가능성을 제시하자마자 구미 포스트모더니즘의 공세와 더불어 앞서 임홍배도 언급했다시피 민족문학의 위기가 정론처럼 통용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90년대는 고은 신경림 현기영 황석영 박완서 등의 선배 세대가 뒷배를 여전히 받쳐주는 상황에서도 민족문학의 새로운 방향전환을 적극적으로 (암중)모색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런 모색은 한때는 민족문학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으나 점차 자유롭고 진취적인 문학의 구상에 족쇄로 작용한 진영 개념을 적극적으로 해체하는 비평 작업으로 나타났다. 그런 해체는 신경숙 공선옥 공지영 등 새로운 시대적 감수성을 발산하는 작가들을 발굴하고 평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다른 한편 민족문학의 새로운 방향 설정을 위한 탐구 또한 멈추지 않았다. 자본주의 근대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도 그런 탐구의 일환이었다. 이는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의 역사적 산물임을 고려해볼 때 당연한 분석작업이기도 했다. 군사독재와의 지난한 싸움으로 인해 그같은 성찰이 유예된 점도 없지 않았지만, 바야흐로 지구화시대가 선포되고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역사의 무대를 장악한 터라 근대주의의 극복을 지향하는 근대의 비판적 성찰은 더욱 긴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찰은 근대의 적응과 극복(=이중과제론)으로 점차 발전하게 된다.

90년대 후반 이후 창비는 민족문학의 ‘해소’ 내지는 ‘해체’를 기정사실화하는 외부의 공세에 맞서 진영 개념의 해체와 신예의 발굴 등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전체적으로 기동전보다는 진지전에 가까운 대형이었다. 지루한 진지전은 세기말까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사건은 역시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이었다. 민족문학을 지향한 문인들에게도 뜻깊은 ‘사건’인 6・15남북공동선언은 해방 후 사실상 처음으로 남북 작가들이 만나 서로의 문학을 두고 토론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냈다. 2004년 북의 작가 홍석중이 『황진이』로 제19회 만해문학상을 받은 것도 상징적인 사건이었지만, 실제로 한동안 북을 체험하며 그런 체험을 작품으로 담아낸 작가들 역시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6・15가 열어준 국면에서 70, 80년대의 민족문학으로 회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았다. 현재적인 관점에서 민족문학의 핵심적 유산을 어떻게 슬기롭게 계승할 것인가 하는 것도 난감한 숙제로 남게 된다.

6・15남북공동선언이 민족문학이 처한 진퇴양난에 출구를 열어준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어떤 점에서는 ‘통일시대’를 내다본 6・15선언으로 인해 민족문학의 진로는 더 착잡해진 면도 있었다. 물론 6・15가 ‘통일문학’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타진하게 한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기에 민족문학은 단순히 폐기처분할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궤적을 더욱 진지하게 탐구해야 하는 대상으로 남았다. 그런 탐구가 6・15 이후에도 중단되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창비는 국적과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면서 그에 실질적으로 부합하는 문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 『창비』 지면에서 촉발되어 평단으로 퍼져나간 ‘문학과 정치’ 논쟁도 그런 모색의 일부였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강조해둘 점은, 민족문학의 유산을 새로이 해석하고 민족문학론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서는 분단체제의 극복을 지향하는 문학도 문학 본연에 충실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런 극복에 매뉴얼이란 것이 있을 수는 물론 없는 일이고, 각자 또 다같이 진지한 모색과 공부의 과정에 참여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 과정 가운데는 70년대 민족문학의 산실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1974~87)를 이어받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2007년 12월 8일에 사단법인 한국작가회의(Writers Association of Korea)로 명칭을 변경한 작업도 포함된다. 필자는 이 명칭 변경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 바 있다. “2007년 당시 민족문학에 헌신한 작가회의의 회원들이 중지를 모아 ‘문학’의 수식어를 ‘민족’에서 ‘한국’으로 바꾼 것은, 1989년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더욱 가속도가 붙은 세계화의 흐름에 역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7) 

창비의 민족문학론은 ‘작가회의’와 더불어 이렇게 ‘한국문학’으로 방향전환을 해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문학 앞에 ‘민족’을 떼고 ‘한국’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는 점 자체가 아니다. 민족문학의 현재적 유산을 온전히 계승하고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혁파하려는 노력은 2010년대 중반에도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물론 이제 그런 노력은 더이상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을 빌리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창비가 그 이름에 담긴 뜻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다. ‘문학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 백낙청의 비평작업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문학은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하면서 민중의 참다운 실감을 살리는 문학다운 문학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1. 염상섭 「모든 문학은 민족문학」, 『염상섭 문장 전집 II: 1929~1945』, 소명출판 2013, 528면.

  2. 신승엽 『민족문학을 넘어서』, 소명출판 2000, 53면.

  3. 임홍배 「창비 30년, 민족문학론의 어제와 오늘」, 『창작과비평』 1996년 봄호 66면.

  4. 최원식 「민족문학론에서 동아시아론으로」, 백영서・김명인 편 『민족문학론에서 동아시아론까지』, 창비 2015, 28면.

  5. 구체적인 논의는 백낙청 「통일운동과 문학」 특히 4절 ‘유월 이후를 보는 시각’ 참조. 『민족문학의 새 단계』, 창작과비평사 1990, 124~30면.

  6. 백낙청 「90년대 민족문학의 과제」, 『창작과비평』 1991년 봄호 100면.

  7. 졸고 「민족문학, 한국문학, 87년체제」,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창비 2013, 15~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