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창비담론아카데미 1] 『변화의 시대를 공부하다: 분단체제와 변혁적 중도주의』

『변화의 시대를 공부하다: 분단체제와 변혁적 중도주의』(창비 2018) 중 백낙청 주요 발언 발췌 (38~58면)

 

담론을 공부하는 이유

지금 이 모임이 창비담론 아카데미라고 되어 있어서, 여러분 중에는 내가 창비담론 내용을 아주 쌈박하게 정리해서 전해주리라는 기대를 갖고 오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담론의 성격상 그게 안되게 되어 있어요. 또 하나는 우리가 이번 모임에서도 담론의 내용을 학습하는 것보다 담론하는 방식을 배우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1974년에 조선일보에 칼럼을 썼는데―그 시절에는 조선일보가 괜찮았어요(웃음)―‘서로 배우는 대학’이라는 짧은 칼럼입니다.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라는 내 책에 실려 있습니다. 그때 담론방식이라는 얘기는 안 했지만, 대학이라는 것이 서로 배우는 데여야지 누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피력했는데, 사십몇년 지났지만 지금도 그런 생각입니다.

이번에 우리가 구체적으로 부닥치는 문제 중에서 많은 분들이 분단체제론이나 변혁적 중도론을 대할 때 공허하다, 모호하다 이런 느낌을 받는다고 했잖아요. 그게 무슨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서 생긴 문제라고 하면 우리가 학습을 해서 채워나가면 되는데 이런 경우에, 꼭 이 문제만 아니더라도, 공허하다고 느껴질 때에 그러면 공허하지 않은 어떤 것을 나는 알고 있고 또는 기대하는가, 이런 것을 점검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습성도 키워나가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지식의 부족을 교습 또는 자습을 통해서 메워나가는 작업과 그런 식의 자기점검, 내가 뭘 기대했기에 이렇게 공허한가 또는 공허하지 않은 무엇을 나는 알고 있고 주장하고 있는가 하는 자기점검을 동시에 병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검을 마치고도 여전히 창비담론의 이러이러한 점이 공허하고 모호하다는 결론이 나면, 어떻게 하겠다 하는 데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그때부터는 한급 더 진전된 논의와 담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담론(談論)이라는 말을 요즘 우리가 많이 쓰는데요, 그렇게 오래된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원래 우리말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말은 ‘언설(言說)’이지요. 언설이라는 말이 흔하고, 일본 사람들이 ‘담론’을 번역할 때도 대개 언설이라고 합니다. 이 담론이라는 것은 영어의 discourse라는 말이 퍼지면서 그 뉘앙스를 더 담기 위해서 쓰였고, discourse가 워낙 유행하다 보니까 담론이라는 말도 유행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담론이라는 용어는 그 뉘앙스에서 원래 언설 플러스 뭔가가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이론적인 깊이가 있다든가 의미가 있는 언설이다 하는 뜻이겠는데, 그러니까 언설 중에 읽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담론일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분단체제론이라든가 변혁적 중도론 공부를 할 때도 그 내용을 학습하는 것보다 좀 읽고 생각하고 말하는 공부를 해봤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한반도적 차원의 변혁과 남한 차원의 실천노선

지난번 토론 결과로 정리해주신 내용에 네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첫번째가 “분단체제 극복 이후의 사회상이나 그 ‘이후’로 가는 전술적 과제들의 제시가 불명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단체제 극복 이후의 사회상과 관련해서는 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있고 알 수 없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제대로 가려보는 게 중요할 것 같고요. 공자님이 말씀하셨듯이 자기가 아는 것은 알고 또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분단체제 극복 이후의 사회상을 너무 뚜렷이 제시한다면 그 사람은 좀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약간 사기성이 있는 인물이라고 봐야 될 것 같아요. 그걸 누가 압니까? 우리가 분단체제 극복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의 분단체제가 이러이러한 체제라는 것을 분석하고 제대로 알아서 그보다 나은 체제로 변환해가려는 노력인데, 가령 민족주의적인 통일이 우리의 지상과제라고 한다면 적어도 그 목표가 뚜렷하지만, 단순한 이 아니라 분단체제를 극복한다고 할 때 그 내용이 뭐냐, 그때 국가의 형태는 어떤 것이며 사회상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미리 예측할 수 없다고 봅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한때 유행했던 레닌의 표현대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 그때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진행하면서 그후의 사회상 같은 것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이죠. 그런데 그리로 가는 전술적 과제는 조금 다른 차원인데, 그러니까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 전략과 전술을 세울 필요가 있는데요, 변혁적 중도론이 말하자면 내 경우에 그런 시도입니다. 전략 차원의 시도지요.

그리고 변혁적 중도론의 내용 중에는 ‘포용정책2.0’이라는 게 있어요. 『2013년체체 만들기』라는 책의 제2부가 주로 그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도 포함하는 변혁적 중도주의가 전략에 해당하고, 전술 차원에서는 그때그때 시국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놨으니까, 전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죠. 물론 그 전술이 틀린 전술이 아니냐 하는 질문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전술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분단체제와는 별로 관계없이, 말하자면 나 개인의 전술적인 감각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이렇게 볼 수도 있죠. 최근의 예를 들자면 『창비주간논평』에 2017년 9월에 촛불혁명에 대해 쓴 글 「‘촛불’이 한반도의 평화를 만들어낼까」라는 글이 있는데, 거기에는 내 나름의 시국관이라든가 전략과 전술이 들어 있는데, 나는 그것이 분단체제론이라는 이론적인 기반을 갖고 전개한 논의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점검해보시되, 첫째는 분단체제론이라는 담론과 구체적인 시평이 정말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시고, 동시에 뭐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맞는 얘기인가, 너무 공허하지 않은가(웃음) 하는 것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변혁적 중도주의라고 할 때에, 「변혁과 중도를 다시 생각할 때」라는 짧은 글을 보더라도, 변혁하고 중도는 원칙적으로 상충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붙여놓은 것은 괜히 멋을 부리려는 것도 아니고, 또 그냥 중도주의라고 하면 될 텐데 그야말로 ‘진짜 중도주의’라는 뜻으로 변혁이라는 수식어를 단 것도 아닙니다. 변혁과 중도라는 것이 해당되는 차원이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둘을 갖다 붙여놔도 상충하지 않는 겁니다. 같은 차원이라면 이런 개념들을 묶어놓는 것은 말장난이거나 모순, 자가당착이 되겠죠. 그러니까 변혁은 한반도 차원에서의 변혁입니다. 한반도 분단체제의 변혁입니다. 중도는 그리로 가기 위해서 남한사회에서 취해야 할 어떤 실천노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발제2에서 ‘중도개혁세력=분단체제 극복세력’ 이렇게 설정한 것은 내 뜻하고는 맞지 않습니다. 변혁의 한반도적 차원하고 중도의 남한 차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겠고요.

그다음에 세계체제 얘기도 나오는데, 세계체제는 또다른 차원이죠. 남한 차원과 한반도 차원과 세계 차원, 이것은 각기 다른 차원인데, 한반도의 변혁이 곧바로 세계체제의 변혁 또는 세계체제로부터의 이탈이 아닐 거라는 게 내 입장이고, 난 그것이 더 현실적인 판단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에 있는 것이 어떻게 세계에서 유례없는 것이 될 수 있는가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끝장내지 못하는 모든 변혁이나 변화는 그냥 대동소이하다, 거기서 거기다, 이렇게 보는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단체제 개량이 아닌 극복의 길

두번째 쟁점으로 정리해주신 것은 “분단체제 변혁의 주역으로서 민중의 개념 범주가 모호해서 실감이 잘 안 된다는 견해도 비교적 자주 반복되었다”고 했는데, 민중이란 말은 논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개념의 ‘내포’가 아주 좁아요. 그 개념을 규정하는 특징이 몇개 안 됩니다. 쉽게 말해서 특별한 위치에 있지 않은 모든 주민들, 대중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 노동자냐, 농민이냐 이런 것이 안 들어가요. 논리학에서 외연과 내포가 반비례하게 되어 있죠. 그래서 민중은 내포가 작은 개념이기 때문에 외연이 엄청 넓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더 좁은 외연의 어떤 집단으로 규정하고 열거해주기를 기대하면 모호하고 공허할 수밖에 없는데, 민중이란 개념은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면 그것 때문에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70년대 말에 「민중은 누구인가」(1979) 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것도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라는 평론집에 실었어요. 그러니까 민중이라는 개념 자체는 외연이 엄청 넓고 규정하는 특징 곧 내포는 매우 좁아서 모호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주어진 상황과 맥락에 따라 그 외연 곧 해당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죠. 누가 민중이 되고 누가 민중이 아닌 게 되는가가 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민중의 개념 자체가 더 뚜렷해져서 노동계급이냐, 노동계급 플러스 누구냐 하고 열거해주기를 바라기보다 이 모호하고 광범위한 개념이 지금 우리 상황에서, 또는 내가 지금 다루는 이 문제의 맥락에서는 어떤 내용을 갖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짚어내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럼 이제 지난번에 문제제기된 지점에서 한번 살펴보면요, 발제1에서 “우리는 통일운동이 민중운동이 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라는 내 문장을 인용하셨는데, 그 문장 자체는 『변혁적 중도론』에 나옵니다. 원래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라는 글에 실렸던 것이고요. 그런데 그 맥락을 보면 우리가 흔히 통일운동은 민중운동이다 또는 민중운동이 돼야 한다고 할 때 떠올리는 입장하고는 전혀 다른 겁니다. 그러니까 통일운동이 민중운동이 돼야 한다는 주장은, 반드시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시절에 흔히 소위 PD적인 입장을 표현하는 것이었어요. 통일운동이 민중운동이고 계급운동이며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그다음에 통일로 가야 된다는 입장인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내 글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에서 정면으로 비판한 입장 중의 하나입니다. 또다른 입장도 비판했지만요. 그래서 그 대목의 문맥에서는 민주주의, 민주화라는 얘기와 같은 것이죠. 그런데 이게 25년 전에 쓴 글인데, 민중운동이라는 말을 요즘도 쓰긴 쓰지만, 요즘 같으면 시민참여라는 말을 더 많이 쓸 거예요. 시민참여를 통해서 국가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국가가 민중을 장악하고 탄압할 수 있는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우리 통일운동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했던 말입니다.

그리고 발제1에서는 이제는 발표자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분단체제의 개량에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못하는 게 현실이 아닌가라고 하셨는데, 먼저 말씀드릴 것은 나는 분단체제의 개량에 반대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분단체제의 개량을 위해서 내 나름의 노력도 해왔는데, 다만 분단체제의 개량만으로는 만족을 못하겠다는 게 있고요, 그건 나의 주관적인 입장이라 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서 이론적으로는 분단체제의 개량만으로 만족하다가는 개량도 못할 것이다, 조금 개량되다가 다시 퇴행하고 그럴 것이다 하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개량을 지지하는 것하고 개량으로 만족하는 것은 구별해야 된다고 봅니다.

『변혁적 중도론』의 77~78면에도 개량을 비판한 대목이 나와요. 그런데 그것도 원칙 차원에서, 개량하려면 극복을 지향해야 된다는 것을 고집한 거고요. 또 하나는 거기서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낙서의 한 대목을 인용했는데요. 그 안에 있는 멋있는 말인데, 전태일이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자기 노트에 썼는데, 그래서 말미에 가서 내가 “분단체제 논의가 좀더 활발해지면서 ‘희망하기’ 공부에도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끝을 맺었지요. 분단체제는 우리가 극복해야 되는 것이니까 괜히 개량한다고 해서 극복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일은 없어야 되겠다, 그건 개량주의다 이렇게 몰아치는 것도 문제지만, 개량만으로 만족하는 것은 전태일 식으로 말하면 희망하기가 부족한 약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량을 분단체제 말고 다른 사안에 한번 대입해서 생각해보시면 돼요. 예컨대 이명박–박근혜 시절에 비해서 지금 엄청 개량됐으니까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 난 불만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 보면 얼마나 공감하시겠어요? 가령 세월호 진상 그만큼 규명했으면 많이 알려진 거 아니야, 그동안의 것으로 나는 만족해,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이건 좀 아니다 금방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개량이나 부분적인 진전을 우리가 우습게 봐서는 안 되지만 그걸로 만족하지 말고 끊임없는 불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발제2에서는 “분단체제론에서는 분단체제 극복과 연동되지 않은 남한 내부 개혁을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다수 시민들은 분단체제의 극복과 무관한 지점에서 남한 내의 개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이것과 관련해서도 남한 내부의 개혁을 나는 반대한 적이 없고, 오히려 남한 내부의 개혁을 통해서만 한반도의 변혁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에요. 그런데 현재 대중의 정서에 대한 진단으로는 발제자의 이 말이 아마 맞을 거예요.

다만 내가 말하는 것은 남한 내부의 개혁이 중요하고 또 분단체제 안에서도 어느정도까지는 가능하지만 그게 한계가 있고, 분단체제가 해소되거나 최소한 완화되는 과정을 수반하지 않으면 남한의 내부 개혁에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더군다나 우리 국민이나 시민들이 분단체제 그런 건 난 모르겠고 내부 개혁만 하겠다 전부 그렇게 돌아서면 아마 내부 개혁도 안 될 것이다 하는 것이 나의 문제제기입니다. 그러니까 발제자의 말은 대중의 정서에 대한 판단이지 이론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이론적인 비판은 아닌 것 같아요. 다시 말하면 장기적 문제제기와 당장의 대중적 반응이라는 별개의 두 차원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론비판을 할 때 남한 다수 시민들의 지지나 대중적 설득력을 판단기준으로 삼아서는 이론적 판단이 불가능하지요. 대중들이 이론적 판단을 하는 게 아니고, 또 여론조사가 대중들의 이론적 판단을 조사하는 게 아닌데 말이에요. 물론 나나 어떤 다른 사람이 변혁적 중도주의나 분단체제론을 내세우면서 이게 대중의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낙관에 젖어 있으면 그때는 여론조사를 동원해서라도 그걸 꼬집어줘야죠. 그때는 정세판단의 차원에서 잘못을 저지른 것, 그 점을 지적해주는 거지요.

『변혁적 중도론』에도 나옵니다만, 분단체제 극복은 물론이고 변혁적 중도주의도 선거구호는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내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내 정치감각에 한계가 있지만 분단체제론이나 변혁적 중도주의를 내걸고 선거에 나가서 이길 수 있다거나, 이기지 못하더라도 상당수의 표를 확보하리라는 생각은 안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주장은 했죠. 아시겠지만 변혁적 중도주의가 아닌 노선을 가지고는 우리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그런 해법 아닌 해법을 들고 나오는 정당이나 정파들에 대해서 우리 대중이 점점 더 냉담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나는 내 정세판단이 정확하다고 봅니다만 그것은 여러분들이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북한에서 시민참여형 통일은 가능한가

세번째는 북한문제입니다. 북한이 공란으로 남았다 하는 지적도 있었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면 전혀 사실이 아니죠. 분단체제론이든 변혁적 중도론이든 늘 한반도 전체 이야기를 명시적으로 하고 있고, 남북한을 얘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의문이 자꾸 발생하는가 하는 것은 나 자신도 한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가장 흔한 질문은 2007년 당시 ‘2007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시민참여형 통일’이라는 강연을 했을 때 언급했어요.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제가 시민참여형 통일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북측에는 시민참여가 없는데 어떻게 시민참여형 통일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북측에 우리 남쪽에서 말하는 의미의 시민참여라든가 우리에게 익숙한 시민사회운동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 그런 것이 없다고 할 때 시민참여에 한계가 지어진다는 것도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시민참여형 통일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죠. 여태까지 우리보다 앞서 통일한 나라의 어느 경우를 보더라도 제대로 된 시민참여가 없었다고 할 때, 거기에 비해 우리 한반도의 통일은 저들보다 한결 높은 수준의 시민참여를 수반하는 통일이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우리 남쪽에서만 하더라도 시민참여라 해서 모두가 똑같은 정도로 참여하는 건 아니잖아요. 또 열성이 있고 준비가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의지를 더 관철하는 것이 참여민주주의의 원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남측에서 고른 참여가 아니듯이 남북간에도 꼭 대칭적인 참여가 실현될 필요는 없는 거지요. 남측 시민들이 북측보다 더 많이 참여해서 남쪽의 시민의식이 더 많이 관철된다면, 그건 일차적으로 남쪽 시민들 자신이 벌어서 이룩한 성과예요. 그러나 물론 남측 시민사회가 그런 시민참여를 할 때 남쪽만의 집단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한반도 전체를, 북녘 주민들의 이익도 함께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북쪽에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시민참여가 없는 건 사실이라 하더라도, 북측의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민간참여, 그것도 자발적인 민간참여가 없다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우선 북측의 공식적인 입장은 당과 인민이 한치의 차이도 없이 움직인다는 것인데, 실제로 그런 측면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어요. 당국이 하는 일을 인민이 어떤 이유로든 자발적으로 지지해서 따르는 것도 참여의 일종이지요. 게다가 그렇지 않은 참여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북에서 경제관리제도가 바뀌고 국가경제의 어려움이 겹치면서 배급체계가 옛날처럼 돌아가지 않게 되면, 주민 각자가 살길을 찾아서 움직이게 됩니다. 전에 없던 주민들의 이동도 생기고 여러가지 창의적인 경제행위도 발생하고 심지어는 불법행위도 많아지게 되는데요. 물론 가장 극단적인 불복행위는 탈북사태겠지요. 못 살겠으니까, 물론 탈북하는 사람들이 다 못살아서 나오는 사람만은 아닙니다만, 못 살겠어서 떠나온다는 것도 좀 예외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일종의 민간참여활동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무튼 생활상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민간활동, 민간참여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민간생활 실상의 변화라는 면에서 본다면 지금 북의 내부에 엄청난 변화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짐작됩니다. 그래서 북은 전혀 변하지 않고 민간사회도 없고 시민참여가 없다, 완전히 철통같은 체제를 유지하고 주민들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시민참여형 통일은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 사실은 묘하게도 북측 정권이 내놓은 체제선전, 즉 당과 인민 사이에 한치의 틈도 없다 하는 주장과 묘하게 맞아떨어져요. 그런 선전과 이쪽에서 특히 수구적인 분들이 북한 주민들은 완전히 세뇌가 돼서 변화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하는 주장이 공교롭게도 상통하는 거예요. 저는 그것이 북측에서 나오는 주장이든 남쪽에서 하는 주장이든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북의 민주주의라든가 인권문제에서 대해서도 우리는 점진적·단계적 접근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겁니다. 통일을 단번에 하지 않고 남북연합이랄까, 낮은 단계의 연방제랄까, 어쨌든 느슨한 결합형태를 거쳐서 한다고 했듯이, 남북한에 걸친 시민참여의 확대와 진전도 단계적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내다보는 게 맞겠다는 겁니다. 남북연합이 언제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남북연합이 이루어지기 이전과 이후는 남쪽 사회에서도 많은 차이가 나겠지만 북측 주민들의 민간참여 방식이나 수준에도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1)

이 글에서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제가 시민참여형 통일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북측에는 시민참여가 없는데 어떻게 시민참여형 통일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이게 아마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의문이기도 할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제 나름의 답변을 세 페이지에 걸쳐서 시도했는데, 우리가 북측에 시민참여가 없다고 할 때, 남한사회에서와 같은 조직화된 시민단체라든가 그런 시민참여가 없는 것은 사실이에요. 100퍼센트 없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별로 눈에 띌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민참여가 없다고 해서 북한 민중들은 그냥 군중대회 나가서 박수나 치고 무조건 우리 장군님 또는 수령님 만세나 부르는 집단인가, 저는 그렇게 보는 것은 첫째 북한인민을 너무나 깔보는 짓이고, 둘째 우리하고 DNA를 공유하는 동포를 너무 얕잡아보는 입장인 것 같아요.

북의 민간사회, 북의 인민생활에 그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배급체계가 무너진 지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거의 각자도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요. 그런 생존이 인민의 창의력이고, 인민이 현실에 참여하는 방식이고, 세상을 바꿔나가는 길이고, 그밖의 여러가지 많지만 그런 것이 하나 있고요. 그러니까 지금 현실도 너무 우리 기준으로만 보지 않으면, 북의 인민들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지금 이 시점의 현실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고, 가령 남북관계가 다시 풀리고 남북연합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할 때는 더 달라지는 것이 많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약에 남북연합 같은 정치적인 타결이 이루어졌을 때는 북의 변화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지지 않겠느냐, 이런 차원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핵문제지요. 북이 저렇게 핵무장을 해서 남북연합은커녕 남북교류조차 가로막히고 있는데, 또 남한 대중의 반북 정서가 이렇게 심화된 상황에서 내가 말하는 한반도식 통일, 그걸 분단체제의 극복이라고도 하는데, 그건 공허한 담론이 되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포용정책2.0이라는 것을 2010년경에 제시했는데요, 김대중 대통령 때 처음 제대로 완제품이 출시되고 그후에 조금 버전업이 되어서 노무현 대통령 10・4선언 때 1.5 정도까지 왔다고 보는데, 어쨌든 1.0대 버전의 포용정책으로는 핵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북의 개혁개방도 안 될 것이다 하는 게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나의 주장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대목에서는 보수주의자나 현실주의자라는 사람들하고 훨씬 가까운 입장인데요. 그래서 『2013년체제 만들기』에 실린 「포용정책2.0을 향하여」(2010)라는 글 뒷부분에 가서는 이런 말도 합니다. “더구나 한반도문제가 비핵화라는 당면과제에 집중됨으로써”–지금은 훨씬 더 그렇게 됐지요–“남북연합을 위한 시민운동의 현실주의적 타당성이 오히려 더 확실해진다.” 믿거나 말거나 그래요. “북이 완전한 비핵화에 동의하려면 이른바 체제보장에 대한 북측의 요구가 어느정도 충족되어야 할 터인데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수교 그리고 대규모 경제원조가 더해지더라도 남한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앞에서 지적했다”(121면). 지금 북은 미국의 대북적대시 정책 때문에 자기들은 핵무장을 절대로 내려놓을 수 없고, 또 심지어 평화협정을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것만 가지고 핵무기 절대 포기 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거기까지가 사실이라 보고요.

북이 말하지 않는 또 하나는 설령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더라도 북의 체제는 여전히 위험에 처해 있는데, 그 최대 위협요소는 남한의 존재라는 겁니다. 그 말은 북이 체면상 말하지 않지만, 북측 당국이 자기들 체제유지를 걱정할 때 이것도 당연히 고려사항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협정을 해주고 북미수교를 해준다고 해서 북이 안심하고 핵무장을 그만둘 이유가 그때도 없었고, 지금은 핵무기를 개발해서 갖고 있는데 그것을 버리는 일은 더군다나 없을 거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이 “한반도의 재통합과정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할 국가연합이라는 장치가 마련되어갈 때 비로소 북측 정권으로서는 비핵화 결단을 내리고 자체개혁의 모험을 감행할 그나마의 여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현실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아직은 이 대목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현 단계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의 핵심현안인 국가연합 건설작업과 북핵문제 해결의 현실주의적 인식 사이에 뜻밖의 친화성이 존재함을 불원간 확인할 수밖에 없으리라 본다”(121면) 하는 대목입니다. 불행히도 지금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담론의 문학적 성격

마지막의 한가지는 정리한 분은 조금 덜 중요시한 건데,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는 합니다. 뭐냐하면 나의 담론이 좀 ‘문학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느냐는 거지요. 사실 이건 사회과학 하는 분들이 내가 하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길 때 잘 쓰는 말이에요. 문학평론가의 상상력을 발휘했다느니…(웃음)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지난번 논의에 서는 문학적 성격이 있기 때문에 정서적인 감화력도 있어서 더 좋지 않냐 하고 지원해주는 발언도 있었던 모양인데, 나는 이 문학적 성격이라는 것을 조금 다른 차원에서 설명해볼까 합니다. 이것도 내가 전에 했던 이야기예요.

사실 분단체제론에서도 그렇고 담론 일반에서 문학적 성격이라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첫째는 아까 담론이라는 것이 결국 읽고 생각하고 말하기라고 했는데, 읽고 생각하는 능력이라는 게 비평적 능력이죠. 넓은 의미의 문학비평적인 능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렇고, 또 하나는 정서적 감화력을 중시해서 개념의 모호성을 초래하는 것이 문학성이 아니고, 말하자면 현실의 텍스트적인 성격, 이건 탈구조주의자들이나 해체론자들이 애용하는 표현입니다만, 현실의 ‘텍스트적’ 성격을 인정하고 이에 적절히 대응하는 일이 문학적인 자세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담론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얘기하고도 통한다고 봐요.

이에 대해서 『변혁적 중도론』 38면에 “사실 이는 분단체제뿐 아니라 모든 복잡한 사회현실에 해당하는 이야기로서, 개념에 상응하는 어떤 물체가 현실 속에 덩그렇게 자리잡고 있는 일이란 없다. (아니, 우리가 ‘평범한 물체’로 흔히 알고 있는 것조차 일종의 ‘복잡한 사회현실’이요 개념의 지시대상을 단순하게 설정할 수 없다는 점을 해체론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고 있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그래서 해체론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비평을 보면 문학작품뿐 아니라 철학논문이라든가, 심지어는 과학논문을 두고도 문학적인 분석을 합니다. 그게 얼핏 보기처럼 사실관계를 중립적으로 서술한 글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분단체제뿐 아니라 모든 사회현실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문학을 했다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적 훈련을 제대로 받으면 이런 점에 민감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할 때, 그렇게 복잡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게 실천에 방해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복잡한 인식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단순화된 인식에 따른 단순화된 실천노선, 그러니까 당장에는 화끈할 수 있어도 지속가능성이 없는 실천노선을 일단 방비해주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복잡한 인식에 탐닉해서 실행력이 약화되느냐 아니면 그날그날의 필요한 실천과 결합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실행주체들의 ‘지혜’에 달렸다고 봅니다. 지혜라고 한 것은 이게 지식과는 좀 다른 차원이고, 단순히 의지만의 문제가 아닌 면이 있지요. 내가 우리 시대를 이제 지혜의 시대라고 규정한 적이 있고, 그 첫번째 글 「지혜의 시대를 위하여」(1990)는 문학평론집 『민족문학의 새 단계』에 실었고, 「다시 지혜의 시대를 위하여」(2001)라는 글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이라는 사회평론집에 실었을 겁니다.

정리해주신 네가지 쟁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다 보니까 거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마치면서 한마디만 더 하면 내 글을 너무 많이 이것저것 인용하고 언급해서 조금 민망하긴 합니다만, 내가 첫날 얘기하기를 기왕 공부를 할 거면 빡세게 해야지 재밌다고 했는데, 여러분이 저의 글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실 거면 이것저것 더 읽어보시라 하는 얘길 하고 싶고요. 또 하나는 강연 같은 데서 분단체제와 변혁적 중도론, 포용정책2.0 같은 얘기를 하면 흔히 나오는 또 하나의 질문은 “참 좋은 말씀인데, 그게 가능할까요?”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나는 “아, 물론 불가능하지요. 여러분이 전부 이렇게 이게 가능할까요 하고 앉아 계시면 그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빡세게 하면서 이것을 남의 일로 보지 말고 자기 일로 삼고, 옳다고 믿으면 가능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동시에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긴 이야기 열심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백낙청 「2007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시민참여형 통일」(2007),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창비 2009), 192~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