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창비담론아카데미 2]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 이중과제론과 문명전환론』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 이중과제론과 문명전환론』(창비 2018) 중 백낙청 주요 발언 발췌

 

세계체제분석의 의미

이종현 교수께서 발제하신 것이 ‘세계체제론과 분단체제론’인데, 그 세계체제론을 제기한 본인들은 세계체제분석(world-systems analysis)이라고 부릅니다. ‘이론’이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해요. World-systems theory라고 할 때 theory가 아니고, 하나의 분석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특히 월러스틴이 그렇지요. 그 학파에서는 월러스틴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고, 또 분단체제론의 경우 그분의 작업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크죠. 발제자는 월러스틴 이야기뿐 아니라 저의 월러스틴 활용이나 분단체제론도 길게 언급하셨는데, 그중에는 저는 인정하지 않는 ‘동아시아체제’ 개념을 도입하는 등 더러 제 생각과 다른 대목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걸 제가 일일이 지적하기보다 토론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점검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월러스틴을 중심으로 두어가지 중요한 논점만 언급하겠습니다.

세계체제분석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분석단위의 문제를 지적한 거라고 봅니다. 가령 자연과학에서 실험을 한다고 할 때 실험대상을 어떻게 잡느냐, 범위를 어떻게 잡고 실험하는 물건의 싸이즈를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게 결정적이잖아요. 그걸 잘 정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회과학에서는 사회 사회 하면서 그 사회의 위가 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 국민국가 체제 성립 이후 대개 하나의 국민국가를 사회단위로 보고 학문을 해왔지요. 세계체제분석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사회라는 사회과학 연구대상의 기본단위가 국민국가인 게 맞느냐, 물론 연구의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는 일국을 다룰 수도 있고 한 지방만 따로 떼서 연구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회체제라고 할 때 한 나라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맞느냐 하는 문제제기죠. 그게 아니고 세계체제라는 것이 성립돼 있으면 그 세계체제 전체가 기본단위가 되고, 그 기본단위 안에서 일국을 다룬다든가 또는 한 지역을 연구한다든가 이렇게 하는 게 맞지 않느냐 하는, 사회과학에서 기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 가장 주목할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계체제라고 하면서 세계를 얘기하니까 흔히 오해하기 쉬운데, 세계체제라는 게 무조건 전세계·전지구를 단위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세계제국이라든가 세계체제라고 하면 어떤한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는 제국(empire) 또는 경제체제 이런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세계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하이픈(-)을 써서 ‘world-systems’라고 합니다. 세계 전체의 체제를 논하는 게 아니라 ‘세계-체제’라고 불림직한 특수한 사회단위를 논한다는 의미지요. 그런데 제국만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세계 전체를 망라한 제국이 없었습니다. 역사상 로마제국도 있고 중국제국도 있고 몽골제국도 있는데, 그 범위가 다 다르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경우에는 세계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전지구를 망라하게 된 체제인데, 그러나 이것도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고 시기에 따라서 포괄하는 범위가 달라졌고, 19세기에 동아시아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면서 일단은 전세계가, 중요한 나라들이 다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석단위 문제가 중요하고요.

지난번 토론 중에서 언급할 것이 있는데,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어 있는 단일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라고 하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나는 그렇게 설정하는 것이 우리가 근대를 연구할 때 과학적이랄까, 유물론적인 분석을 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 자본주의는 쏙 빼고 근대에 이뤄진 이런저런 성취들이 있잖아요, 그중에서 본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근대성이라고 이름 짓고 그걸 위주로 근대를 정의하면, 첫째는 상당히 관념적인 논의로 흐를 염려가 있죠. 그러한 근대성을 낳은 경제체제나 물질적 기반이 무엇인가 하는 논의가 빠지니까요. 또한 그럴 때 뭐가 근대성이냐 하는 것은, 진짜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에요. 그러다보면 중구난방이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근대성에 관한 논의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저도 일부는 했습니다만, 어쨌든 ‘근대라는 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다’ 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접근하는 게 좋지 않나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요즘 특히 대안적 근대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대안적 근대성이라는 얘기는 더 많이 합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근대성은 사람들이 자기가 정의하기 나름이니까, 이제까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근대성 이외에 다른 근대성의 흐름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안적 근대라고 하면 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는 다른, 서구에서 발생한 그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완전히 극복한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대안적인 걸로 병존하기도 하는 근대를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이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잡식성인지, 즉 자본주의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다 잡아먹고 자본주의의 이름으로 만드는 그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과소평가하는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근대와 근대성의 구별로 분명해지는 것들

근대라는 말을 쓰고 근대성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렇게 두가지 별개의 단어가 있는 것이 동아시아 언어의 아주 특이한 점이에요. 서양에서는, 영어를 기준으로 한다면, 불어도 마찬가지인데, ‘모더니티’(modernity)가 근대라는 시대를 가리키기도 하고 근대의 특징인 근대성을 가리키기도 해서, 그때그때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뜻으로 썼는지를 정확하게 헤아려서 우리말로 옮겨야 하죠. 만일 필자는 근대성을 얘기했는데 우리는 그걸 근대라고 번역한다든가 하면, 그러잖아도 골치 아픈 논의가 훨씬 혼란스러워집니다.

아직까지는 서구의 담론과 언어가 세계적으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으니까 그들의 용법을 우리가 알기는 알아야 하는데, 한편으로 그들이 중국어라든가 일본어, 한국어를 배워서 ‘아, 동아시아에 가니까 근대라는 말이 따로 있고, 근대성이라는 말이 따로 있더라’ 하고 깨달아야 옳죠. 더욱이 우리에겐 근대라는 말이 있고 현대라는 말도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의 ‘modernity’는 최소한 그 네가지 의미가 범벅이 되어 있어요. 그런 저개발된(웃음) 언어구사를 우리가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 점은 제 논문, 네이버 강연에서 발표한 글에도 나와 있고, 영어로도 『뉴레프트리뷰』에 제가 설명해놓은 글이 있습니다.

영어 모더니티(modernity)에는 근대, 근대성, 현대, 현대성 등 우리말로 각기 달리 표현되는 여러 의미가 있다. 이를 두고 한국어가 영어를 도저히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할 수도 있으나, 달리 보면 한국어(그리고 한자문화를 공유하는 중국어와 일본어)가 용어를 달리하면서 정밀하게 변별하는 능력을 영어나 기타 서구어들이 결여하고 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곧 우리말로 ‘근대’는 중세 (또는 전근대) 다음에 오는 시대이고 ‘근대성’은 그러한 시대의 특성을 일컫는 추상명사이며, ‘현대’는 어느 특정한 시대의 명칭이라기보다 ‘지금의 시기’ ‘최근의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고 ‘현대성’은 그것과 연관된 추상명사가 된다. 물론 지금도 자본주의 근대가 지속되고 있다는 관점에서는 ‘현대’가 ‘근대’와 내용상 같은 것일 수 있고, 아니면 ‘근대’ 중에서 현재에 더 가까운 일부를 가리킬 수 있다. 그러므로 ‘근대성’과 ‘현대성’이 전혀 별개의 개념일 수는 없지만, 다른 한편 근대의 여러 성격 중 어떤 것을 더 새롭고 때로는 더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하느냐에 따라 ‘현대성’의 의미가 달라진다.1)

월러스틴에게 운동론이 있느냐 하는 논의가 나왔는데, 그분도 운동 논의가 있고, 뽀르뚜 알레그리(Porto Alegre)에서 ‘세계사회포럼’ 같은 거 하면서 열심히 다니고 그래요. 그리고 『반체제운동』이라는, 단독저서는 아니고 몇 사람과 공저한 것이 창비에서도 번역되어 나온 바가 있죠.* 영어로는 Antisystemic Movements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운동론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중과제론적인 인식이 좀 약해요. 반체제운동을 통해서 극복한다는 얘기는 있지만, 극복이라는 게 그냥 쉽게 되는 게 아니고 적응과 극복의 노력을 잘 조율하면서 그때그때 그 지역의 사정에 맞게 운동을 전개해도 될까 말까 한 판인데, 그런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이른바 선진국 지식인들,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약점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기 국가나 국민국가의 질서 또는 기존 정치질서가 워낙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뭐라고 몇마디 한다고 해서 이게 바뀌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 나라 문제는 아예 덮어놓는 거죠. 일본 지식인들이 그게 심하고, 미국 사람들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세계적인 반체제운동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것도 의미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근대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새로운 세계체제를 만들자는 그런 반체제운동을 할 때에는, 동시에 자기 사는 나라의 국가를 어떻게 바꿀 건가 하는 국가개조에 대한 비전을 동시에 가지고 중기·장기 구별하면서 추진하는 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게 없으니까 사람들이 월러스틴 저 사람은 맨날 성층권에서 놀면서(웃음) 큰 이야기나 한다는 인상을 받는 것 같습니다. 월러스틴에 대해서는 나중에 여러분이 또 말씀을 하시면 더 해보기로 하고요.

이중과제론도 지난번 두 발제의 공통 주제였는데, 적응하면서 극복한다는 게 근사하게 들리지만 사실 논리적으로 안 맞지 않느냐, 형용모순이 아니냐 이런 지적도 나왔더군요. 나는 그건 순전히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순응과 극복’ 이렇게 말하면, 순응도 하면서 극복도 한다는 것이니 모순이 틀림없습니다. 또 성취와 극복 그러면 이것도 모순일 수 있고요. 모순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취를 해놓고 그다음에 극복을 하는 거니까 이건 순차적인 과제지 동시적으로 추진하는 과제는 아니다, 이렇게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취라는 말을 일부러 피해 적응이라는 말을 썼다는 얘기를 제가 글로 발표한 적이 있고 사회자도 지적하셨습디다. 성취라 하면, 근대라는 게 좋은 거니까 우리가 그것을 일단 성취해놓고 그다음에 극복하자는 논의가 되지요. 반면 적응이라 하면, 근대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 좋은 점은 물론 성취해야 하지만, 나쁜 점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불가피하면 그야말로 꾹 참아내야 한다는 뜻이죠. 적응을 해야 해요. 감당해내야 할 일입니다. 적응을 그렇게 해석하면, 감당하면서 동시에 극복하는 노력을 한다는 게 논리적으로 전혀 모순될 게 없는 거죠.

 

이중과제는 상식적이며 유연한 개념

적응과 극복, 더군다나 근대라는 것을 끌어들여서 ‘근대의 이중과제’라고 하면 근사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막연하고 어렵게 들릴 수 있는데, 사실 일상생활의 경험에 비춰보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가령 우리가 돈 없으면 사람이 완전히 짓밟히는 세상에 살고 있고, 돈벌이에 얽매여 사는 꼴은 나는 참 싫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보다 좀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필요한 돈은 벌고 먹고살아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게 이중과제론이거든요. 반면 그런 태도를 안 취하고 무조건 이 세상의 논리에 따라서 돈벌이 경쟁에 뛰어든다거나, 물론 그렇게 살다 가는 사람도 많지만 그건 좀 불쌍한 중생들이고,(웃음) 다른 한편으로 이런 세상은 틀려먹은 세상이니까 나는 극복하겠다 그러면서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큰소리만 치고 있으면, 그게 극복에 별로 도움이 안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당장에 적응하거나 감당할 건 감당하면서 극복의 노력을 한다는 것,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극복하겠다는 큰뜻이랄까, 이런 게 있는 사람들이 적응을 더 잘해요. 더러운 것도 더 잘 참고. 어떤 의미에서는 방법도 훨씬 유연해집니다. 괜히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서 원칙만 내세울 필요가 없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할 일이 있으니까, 그 일을 해야 하니까. 그런데 그런 목표를 세웠다 하더라도 사람이 살다보면 어느덧 그 꿈은 사라지고 그냥 먹고살기에 바빠서 순응하며 살다가 가는 경우가 많이 있죠. 그래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나를 비판할 때 하는 얘기가 이거죠. 적응과 극복, 이게 말은 근사하지만 결국에는 순응의 논리 아니냐는 건데, 그게 순응의 논리는 아니에요. 순응으로 끝날 위험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고 어찌 보면 그것은 근대인의 실존적인 위험부담, 리스크라고 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논리를 내세워서 실패가 약속돼 있다고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중과제론의 기여

그다음에 페미니즘 문제인데, 이건 앞으로 토론할 게 많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발제는 페미니즘과 이중과제론의 친화성이라는 김영희 교수의 논지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정리자가 질문했듯이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각종 여성문제들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별개의 문제이니까 따로 논의해볼 일이죠.

근대의 이중과제론은 추상수준이 굉장히 높은 담론입니다. 이중과제론이 근대에 관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근대라는 게 얼마나 큰 주제입니까. 이렇듯 추상수준이 높은 담론이므로 특정 현실문제에 적용할 때 거대담론에서 연역하는 방식을 우선 경계해야 하고, 동시에 논의 차원의 혼동을 경계해야 할 겁니다. 어떤 특정 문제가 있으면, 이게 어떤 추상수준의 논의인지를 정확하게 짚어서 거기에 맞는 정도로 이중과제론을 적용해야지, 그 이상을 하면 그야말로 연역하는 방식이 될 거고, 그 이하를 하면 논의가 미흡해지겠죠. 그래서 예컨대 성폭력 사태들에 대한 규탄과 시정 노력에 굳이 이중과제론을 끌어들여 이야기를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당장 미투운동하는 데 가서 이중과제론 어쩌고 하면 ‘저 사람이 김 빼러 왔나’ 그러지 않겠어요? 다만 기존의 사회체제 안에서 할 수 있는 단기적 투쟁을 더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과연 세상이 달라질지, 성차별이 만연해 있는 이 세상을 정말 바꿀 수 있는지는 고민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전지구적 페미니즘에 해당되는 사안으로 평등과 차이의 대립이라는 난제가 있는데, 이걸 근대의 틀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지, 없다면 어떤 식으로 근대를 극복해야 바람직한 평등과 바람직한 차이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는지도 우리가 연구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은 당면한 차별 철폐, 성폭력 규탄운동을 적극 추진하되 궁극적 목표는 평등 자체보다 ‘음양조화’로 하자고 제언했는데, 그러다 많이 비판을 받았죠.(웃음) ‘지금 차별문제, 성폭력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데, 당신은 그런 딴소리만 하느냐’ 하는 얘기도 들었는데, 그래서 최근에는 제가 그런 얘기를 삼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문제가 더 심각해져서 괜히 음양조화 어쩌고 얘기를 했다가는 실제로 본인에게 이로울 게 없을 뿐 아니라, 사실은 지금 전술적으로 그럴 마당도 아니에요. 너무 사태가 심각해서요. 그래서 많은 오해와 반박을 자초하는 말이었지만, 음양조화라는 것은 ‘남녀이분법’에 얽매이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동양의 음양론에 의하면 한 사람의 몸 안에도 음적인 요소가 있고 양적인 요소가 있고, 또 이것은 꼭 남녀라는 개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천지의 기운으로도 나타나는 등 다양한 현상으로 구현됩니다.

음양조화라는 말을 어떤 투쟁의 현장에 끌어넣을 건 아니지만 연구하는 자리에서는 너무 괄시는 안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웃음) 그래서 이것을 성차별 철폐운동에 반대하거나 너무 미적지근한것 아니냐 이렇게 몰아칠 필요도 없고, 음양 어쩌고 하는 게 남녀이분법에 얽매인 것 아니냐 이렇게 쉽게 예단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원불교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되어 있는데, 원불교라는 종교는 초창기부터 ‘남녀권리동일’을 주장했습니다. 원불교에서 인생의 요도(要道) 네가지를 사요(四要)라고 해요. 사요 중에서 원래 첫 항목이 남녀권리동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자력양성(自力養成)’으로 바뀌고, 그 자력양성 중의 첫번째 항목으로 남녀권리동일이 들어가요. 그러니까 남녀권리동일을 뺀 건 아니고 자력양성이라는 더 큰 범주 안에 집어넣었는데, 이게 잘됐냐 잘못됐냐 하는 건 논의의 여지가 있죠.

사요의 두번째 조항이 ‘지자본위(智者本位)’라고 되어 있어요. 지자본위는 지자와 우자(愚者)를 차별하자는 얘기입니다. 동시에 지우의 차별 말고 다른 모든 차별을 없애자는 입장이에요. 나아가, ‘지우의 차별마저 없애버리면 기존의 온갖 부당한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다’라는 주장으로까지 될 수 있습니다. 원불교 교단에서 그렇게 말씀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해석해요. 지우차별을 없애면 결국 다른 차별이 더 기승하게 돼 있고, 또 역으로 다른 차별이 유지되면 지자본위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남녀차별이 심한 세상이라면 여자가 아니고 남자가 되는 게 중요하지 여자가 지자가 되는 게 중요하지 않잖아요. 또 빈부의 차가 심하면 돈 많은 게 제일이지 지자가 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차별의 철폐와 지우차별이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나중에 더 논의해보기로 했죠.

 

평등과 위계에 대한 문제제기

‘지혜의 위계질서’ 이 문제는 지난번 사회자 진행발언대로 추후에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게 바람직한데, 방금 말한 것처럼 페미니즘 논의와 그대로 이어지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가지 제안을 한다면 현대인에 대한 설득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동양의 전통사상이나 한국의 토착종교인 원불교 사상에서 출발해서 우리 동양에서는 도와 지혜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풀어먹이는 방법보다도, 서양인들 스스로 자기들 담론을 통해서 문제를 인지했는데 그것이 제대로 해결이 안 될 때 ‘당신들이 생각하는 해결책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지 않느냐’ 이렇게 접근하는 방식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겁니다. 가령 진과 선이 분리돼있다는 것이 서양철학에서는 큰 문제입니다. 이론과 실천의 분리라는 식으로 제기되기도 하죠. 월러스틴이 진과 선의 분리를 극복해야 한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 이분은 ‘극복’은 아니고, 진과 선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라틴어에서 나온 말이지만 ‘in tandem’(동시에)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제가 월러스틴과의 대담에서도 말했지만 ‘in tandem’ 가지고는 안 되지 않느냐, 동양의 도 개념에서 보면 ‘in tandem’이 아니고 진과 선이 본디 융합돼 있는데, 그런 게 있어야지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는 게 아니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양 사람이 먼저 제기한 문제를 받아서, 그것이 도나 지혜 같은 개념 없이는 해결이 어렵다는 걸 지적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훨씬 나은 전략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와 대담한 내용이 『백낙청 회화록』 7권에 나와 있습니다. 그 「자본은 어떻게 작동하며 세계와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를 보면 하비 교수가 먼저 그 얘기를 해요. 수평주의 수평주의 그러는데, 자기는 물론 수평주의, 수평적 네트워크에 찬성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는 수평 가지고는 안 되는 게 있고, 심지어는 그게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그것을 여기저기서 부분적·기계적으로 해결해서 될 일은 아니고, 평등의 개념 자체를 새로 점검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했는데, 그분한테는 잘 안 먹히더군요. 월러스틴 교수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식 위계질서를 다시 끌어들이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는데, 나는 적어도 지금 서양에서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의 사고에 발본적인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월러스틴이 뭐라고 문제를 제기해놓고 답을 잘 못한다, 하비가 이러저러한 문제제기를 하는데 본인이 원만한 해답을 못 내놓는 것 같다는 걸 지적하면서, 그럴 때 동아시아 전통에 있는 개념을 한번 활용해보면 어떨까 이렇게 접근하는 게 더 설득력 있는 방식일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또 논의할 여지가 있으니까 그때 하기로 하고, 오늘 제 얘기는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동아시아론에 대하여

지난 모임의 첫 발제, ‘이중과제론과 동아시아론에 대한 질문들’은 2008년 백영서 교수의 논문 「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주로 다뤘더군요. 발제문에 보면 타께우찌가 1940년대에 근대초극론을 제시했다고 표현했던데 이건 혼란스러운 표현이에요. 1942년에 근대초극론을 펼친 것은 일본의 쿄오또학파였고 그때 유명한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타께우찌는 1959년에 가서 그것을 평가하는 논의를 합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논자가 1942년의 논의가 일본 파시즘에 동조하는 거였다고 일축하고 마는데, 타께우찌가 그렇게 간단하게 볼 일은 아니라면서 근대초극론을 다시 정리하는 논의를 벌인 것이 1959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타께우찌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것을 제창했는데, 이것이 그 나름의 고뇌의 소산이고 또 굉장히 생산적인 논의였던 건 사실입니다. 그후로는 ‘방법으로서 무엇’이 일종의 유행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그게 ‘내용’은 빼고 그냥 ‘방법’만 얘기하는 것으로서, 어떻게 보면 ‘내용’의 문제를 회피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난바라 시게루(南原繁)라는 사람을 잠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은 토오꾜오대 초대총장이고, 그러니까 타께우찌라든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같은 이들의 스승 급입니다. 정치학자이고 일본 파시즘에 대한 아주 준열한 비판자고 전후의 민주주의 건설에 기여한 사람인데, 그가 일본을 얘기할 때는 옳든 그르든 아주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일본 파시즘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건설해야 하지만 서양식으로 가지 않고 일본식으로, 아시아식으로 가려면 일본공동체의 상징으로서의 천황을 중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무엇을 건설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천황론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리버럴한 민주주의론과 천황제라는 것을 결합한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타께우찌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것을 일본 담론계에 던지면서 그런 게 안 나오는 거죠. 사실 타께우찌가 난바라처럼 천황제를 들고 나올 수는 없는 것이었고요. 다만 ‘방법’을 말할 때 그게 ‘내용’의 문제를 회피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발제에서는 동아시아론의 중·장기 과제에 적극 공감하면서도, 우리가 가진 실천적 역량에 비해 다소 과제가 과중한 것은 아닐까라고 의문을 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당면한 과제들은 지역 내에서 교류협력이 지속될수록 이질적인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닐지 물었는데, 우리 자신의 실천적 역량이 과연 충분한가 하는 질문은 누구나 던져볼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가다듬자는 뜻에서 실천적 역량의 미흡한 점을 반성하고 실행을 어떻게 해가겠다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과제는 우리한테 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라면 ‘중·장기 과제에 대한 적극적인 공감’은 일종의 레토릭이 아닌가 하는 거죠. 그리고 교류협력이 지속될수록 이질적인 사람들이 같이 사는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은 틀림없는데, 단기적으로 같이 사는 문제가 과제라는 말은 동아시아론과 동일한 차원에서 이를 비판하겠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동아시아 논의를 이질적인 사람들이 ‘같이 사는 문제’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논의로 바꾸는 것인지, 그런 것은 스스로 살피면서 진행할 필요가 있겠죠.

 

이중과제론과 원불교 공부에 대하여

다음으로 ‘이중과제론과 백낙청의 원불교 공부’라는 두번째 발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발제문에서 얘기하듯이 내가 원불교의 정신개벽론을 중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특히 그것이 ‘물질개벽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이라는 점을 늘 강조해요. 왜냐하면 ‘정신개벽’이나 또 그 비슷한 얘기는 종교 하는 분들이 거의 누구나 하는데, 물질개벽 시대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거기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느냐는 논의는 비교적 덜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가령 동학이나 증산도가 전부 ‘정신개벽’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지만,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다 정신개벽을 강조하는데, 그래서 후천개벽 사상의 틀 안에 들어가는데, 선행 사상들과 원불교의 구별이 가능해지는 지점이 바로 이것 같아요. 물질개벽 시대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에 부응하는 정신개벽을 하자. 여기에 다들 얼마나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원불교 해석은 그렇고, 그래서 제가 원불교 얘기를 자꾸 하는 거예요. 물론 원불교가 동학이나 증산도하고 차별되는 또 하나는 원불교는 불법(佛法)을 주체로 삼겠다는 것을 처음부터 표방하고 나온 것이죠. 유불선 3결합을 추구하는 것은 세 종교가 다 똑같지만 그중 원불교는 불교를 특히 중시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죠.

그리고 태평천국에 대한 이야기도 토론에서 나왔던데요. 태평천국과의 비교에도 이런 식의 이중과제론적 관점을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다음에 한말의 개화파·척사파·개벽파 얘기가 나왔죠. 원래는 우리가 근대사를 해석할 때 개화파와 척사파 그리고 개벽파라는 말보다는 동학이란 말을 써서 3대 흐름을 얘기하다가 주류학계의 논의에서는 슬그머니 동학 쪽 이야기가 줄어들고 개화파와 그에 정면으로 맞섰던 척사파라는 구도로 갔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개화파에 유리한 구도 같아요. 그런데 개벽파라는 용어를 통해서 3자구도를 다시 복원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가지 흐름을 평가하는 기준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여기도 이중과제론을 한번 적용해보면 어떠냐 하는 생각입니다.

가령 개화파라는 것은 이중과제론 입장에서 보면 근대극복보다는 근대적응에 주력한 그룹이죠. 그중에는 급진파가 있고 온건파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근대적응파입니다. 척사파는 근대거부파죠. 근대에 적응하면서 극복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냥 거부했던 것이죠. 그렇게 보면 개벽파가 거의 유일하게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에 어느정도 부합하는 흐름이었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당시 개벽파가 근대적응의 능력이 어느 정도였고, 근대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근대극복을 위해서 어떻게 노력했으며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그 관점에서는 높이 평가하기 어렵지 않은가 합니다. 한말의 시점에서는 실패한 게 사실이고요.

사상적으로는 다시 원불교 얘기가 나오는데, 개벽파의 흐름이 한편으로는 불교와 결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개벽 시대의 현대과학문명에 대한 인식이 더 깊어지면서 물질개벽에 상응하는 정신개벽 운동을 벌이자라고 했을 때 적어도 이중과제 수행의 기본적인 골격은 갖춰졌습니다. 현대 원불교 교단이 그걸 얼마나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을 들어봤으면 합니다.

“삼동윤리 무서운 줄 알자”라고 내가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발언을 상기시켜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삼동윤리는 탈교단주의만이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탈종교적 사상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조직화된 종교의 하나임에 틀림없는 원불교에서 이런 탈종교적 교리를 내세웠다는 것이 패러독스라면 패러독스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원불교 교역자들로서는 굉장히 무서운 얘기가 되는 것이죠. 아무튼 저는 탈교단적·탈종교적 사상이라고 하는 그 점을 중시하고 있고요.

문명전환을 위한 종교의 역할에 대해 ‘탈종교적 교단이 과연 가능한지’ 하는 것은 더 논의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원불교 교단이 이미 삼동윤리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으면 여기에 대한 일정한 답이 나온 셈이고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답이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의 범례가 제공된 셈일 텐데, 반면에 원불교조차 그 문제로 고전하고 있다면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하는 것을 더욱 실감하겠죠.

 

동아시아에 대한 개념 정리

동아시아는 주제와 시기에 따라 그 내포와 외연이 달라집니다. ‘동아시아체제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동아시아체제’는 그다지 엄밀한 개념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분단체제’는 엄밀한 개념이냐 하는 소리도 많이 듣고 살아왔습니다만,(웃음) 상대적으로 동아시아에 비하면 분단 한반도는 훨씬 체제에 가깝죠. 그런데 동아시아는 지금 말대로 주제와 시기에 따라 그 내포와 외연이 달라지니까 이것을 가지고 체체론을 벌이기는 참 어렵다는 생각이에요.

그리고 동아시아라는 표현이 있고, 동북아시아가 있고, 아시아, 아시아-태평양 등 여러 개념들이 있는데 내용상 이것들이 다 중첩되는 것이지 배타적인 것은 아니죠.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사전상의 의미로만 따지면 동북아시아는 동아시아 중에서 북쪽의 절반쯤 되는 것아니겠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죠. 실제로 동북아시아라고 하면 여전히 중국이 들어가니까. 물론 중국 사람들은 이 단어를 별로 안 쓰죠. 자기들은 동북(東北) 그러면 동북3성이지 어떻게 중국이 동북아시아에 들어가느냐 하지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동북아시아 또는 북동아시아 얘기할 때 당연히 중국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북쪽 절반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큰 덩어리가 들어가고 또 대개 동북아시아 얘기하면 러시아가 들어가요, 6자회담에도 들어가고요. 그래서 이게 굉장히 유동적입니다.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개념이고요. 최근에는 ‘인도-태평양’이라는 개념도 나오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중국을 배제하기 위한 개념·구상 같아요.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말할 때 태평양이라고 하면 중국도 들어가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구상인 것 같고요.

그런데 분단체제론이나 저의 입장에서 사회분석의 기본단위는 어디까지나 세계체제입니다. 따라서 정리자의 질문1 중에서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요한 분석단위로 상정할 때”라고 한 것은 세계체제론 및 분단체제론의 대전제에 어긋나는 어법이죠. 다만 ‘동아시아’ 개념이 세계체제 속 특정 지역의 현실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하나의 전략적 도구일 수는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그에 이어지는 물음 “동아시아의 협력체제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구심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충분히 논의할 만한 주제인데, 일반적으로 이렇게 남한테 반론성·반박성 질문을 던질 때 처음부터 질문 자체로 상대방을 옭아매놓고 하는 것은 페어플레이가 아닌 것 같아요.(웃음) 동아시아의 협력체제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게 질문의 요지인데, 거기서 더 나아가 ‘구심점’이 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답하는 사람이 굉장히 곤란해지죠. 그냥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구심점이 되는 것까지 입증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구심점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로 논의를 좁히지 말고 어떤 동아시아의 어떤 협력체제가 얼마만큼의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을지를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질문2 “동아시아 협력을 할 때 시민들의 참여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차원의 국가연합 또는 복합국가가 적어도 상당기간 불가능하다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시민참여의 중요성을 높이는 면도 있음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겠는데, 그에 관해서는 『역사비평』의 기고문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동아시아에서 지역적 유대를 형성하는 작업은 기존의 어떤 구상보다 담대하고 창의적일 필요가 있다. 유럽의 선례를 참고하되, 우리도 언젠가는 유럽 같은 국가연합을 만들 수 있다는 허황된 기대를 접어야 하고, 유럽연합보다 저급한 공동체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도 벗어던져야 한다. 국가가 기본단위로 통합하는 공동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야말로 도리어 지역주민 위주의 접근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정부를 제쳐두고 시민들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정부가 자유무역협정 같은 다양한 쌍무적 또는 다자적 협약을 통해 지역공동체 형성을 촉진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연합을 통해 안보,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유대를 일거에 강화하는 대신, 분야마다 지역의 현실에 가장 부합하고 주민들의 생활상의 이익에 충실한 형태와 수준의 협력관계를 다양하게 구현해가자는 것이다.2)

 

복합국가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

그다음 복합국가라는 개념은 요즘 백영서 선생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있고, 지난번 논의에서도 많이 나왔죠. 이 이야기가 한국 담론계 논의에서 처음 나온 것이 1972년인가 73년인데, 그 무렵에 천관우(千寬宇) 선생이 그 얘기를 처음 했어요.3) 그분은 저널리스트고 한국사 연구자이지 정치학자가 아닌데, 당신이 어디서 정치학 책을 들춰보니까 복합국가라는 말이 연방제니 연합제니, 즉 단일형 국가가 아닌 온갖 국가를 포괄하는 개념이더라 그러셨어요. 그런데 내가 정치학자들 얘기를 좀 들어본 바로는 어떤 학자는 그것을 별로 인정 안하더라고요. 그만큼 학계에서도 그다지 보편화된 개념이 아니에요. 천관우 선생이 그 얘기를 할 때는 북에서는 고려연방제 제안을 했고 남한은 주야장창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하던 때여서 연방 비슷한 얘기만 했다간 큰일 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복합국가라는 말을 어디서 찾아내서 쓰신 겁니다. 당시의 역사적인 맥락에서는 아주 적절한 문제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를 보면 이미 연방제·연합제 얘기도 많이 나왔고, 요즘은 연방제 얘기를 해도 종북좌파로 몰리긴 하지만 잡혀가지는 않아요. 그런 데다가 2000년에 이미 남북정상이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합의를 봤기 때문에, 이제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는 어떻게 다르며, 공통점이 있다지만 어느 쪽에 더 치중할 것인가 같은 점을 살펴봐야 할 때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당연히 연합제가 당면과제라고 생각하는데, 임동원(林東源) 선생의 회고록 『피스메이커』4)를 보면 김정일 위원장도 그때 실질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 형편으로는 연합제도 낮은 단계, 높은 단계로 쪼개서 ‘낮은 단계의 연합’이 당면과제가 아닌가 싶어요. 이렇게 아주 더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갈 시점인데, 복합국가라는 말은 그런 논의를 회피하는 결과가 될 수 있어요.

한반도에 국한하는 얘기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나라마다 상황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복합국가라는 더 포괄적인 용어가 편리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동아시아가 가령 유럽연합 같은 복합국가를 만들 가능성은 당분간 거의 제로이고, 그렇다고 중국이 남북연합 같은 그런 복합국가로 나아갈 건가 하면 그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합국가가 딱 적용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아니 거의 없다,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을 인식하면서 복합국가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가 있고요.

다음에 동학, 동도서기, 보편성, 종교 등 여러 개념이 나왔는데, 동학(東學)의 ‘동’을 나도 옛날엔 동양의 ‘동’이라고 생각하다가, 동학의 동은 한반도의 동이라는 박맹수 교수의 주장을 읽고 일찌감치 승복했습니다. 그런데 동도서기(東道西器)는 이른바 온건개화파 유생들의 개념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무슨 후천개벽의 진원지로서 ‘한반도=동’이라고 했을 리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말을 썼고, 중국에서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는 말을 썼는데, 둘 다 자국중심주의적인 표현이죠. 그에 비해 한반도에서는 동도서기라는 말을 쓸 때 그 동이 한반도가 아니고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라고 하면 이것은 적어도 자국중심주의에서는 벗어나 있고, 어떤 점에서 유교적 보편주의를 주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도서기론에 대해서는 『흔들리는 분단체제』 243면에서 약간 언급한 바가 있고, 또 도와 기의 구별과 합일 문제는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에서 말한 바가 있습니다.

인류 전체의 생존과 보람있는 삶을 위해서도 ‘우리 것’이 어떻게 필요한지가 분명해져야 하는데, 진리에 대한 다수 서양 지식인들의 신념 상실을 보나 현대 기술문명이 초래한 인류 파멸의 위험을 보나, 옛날처럼 서양인들의 ‘서도서기(西道西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우리가 ‘동도서기(東道西器)’를 하느냐 마느냐만이 문제이던 시기는 지났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이제야말로 ‘동도서기’를 새로 할 때라는 말은 아니다. ‘동’과 ‘서’가 비교적 분명히 구별되던 시절 자체가 이미 지났고, 지금은 기술문명을 두고도 ‘서기’라 부르는 것이 역사적인 연원을 따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요는 동서를 막론하고 ‘기’만 남고 ‘도’는 사라지다시피 한 상황인데, 여기서 오늘의 기술문명을 이끌어줄 새로운 진리 내지 ‘도’가 필요한 것이며 그런 의미의 새로운 ‘도·기 합일(道器合一)’이 세계체제 자체의 현실에 의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푸꼬가 종전의 인문주의자와 같은 ‘보편적’ 지식인보다 정치의식을 지닌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R. Oppenheimer)와 같은 ‘특수’(specific) 지식인을 이야기할 때, 일종의 현대판 ‘도기합일’에 대한 구상이 연상되기도 한다.** 다만 푸꼬에게는 ‘도’의 개념은 물론 과학이나 형이상학의 ‘truth’가 아닌 그 어떤 진리에 대한 개념도 없기 때문에, 그의 이 발상은 진정한 도기합일을 촉진하기보다 전문적 지식인의 세계지배를 합리화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그가 ‘특수 지식인’을 근년의 대학 속에 이미 자리잡은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인상을 더해준다. 진리 개념의 부정이라는 면에서 푸꼬는 물론 극단적인 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양의 ‘진리’는 비록 그 자체가 나름의 ‘도’를 구현하는 방편이었다고 해도 ‘도’로부터는 너무나 오래, 너무나 멀어진 것이기에, 오늘날 ‘도기합일’에 해당되는 그 무엇이 요청되고 있다면 아직도 ‘도’의 개념이 얼마간 살아 있는 동양의 인문적 전통과 한국인의 주체적 실천에서 배울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 ‘우리 것’이 우리만의 특수한 관심사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여기서 열린다.”

*‘도기합일’이라는 표현은 ‘현대의 학문체계’ 공동연구 중 이성규(李成珪) 교수의 발제(1992.9.25)에 힘입었다. 다만 본고에서는 그 원뜻보다 필자의 문맥에 맞춰 임의로 적용한 것이다.
**Michel Foucault, “Truth and Power” The Foucault Reader, ed. P. Rabinow, Pantheon 1984, 68~69면.5)

그다음에 보편성 문제인데 정리자의 질문3은 이렇습니다. “‘보편성’을 어떻게 봐야 할까. 수평적 보편성, 소통적 보편성, 매개적 보편성 등의 용어도 거부해야 할까.” 나는 굳이 ‘거부’할 것까지는 없지만 ‘보편성’에 자꾸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이는 것 자체가 ‘보편성’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도’와 ‘보편성’의 차이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도’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길’이죠. 가파르게 올라가는 길도 있지만 일단 ‘길’은 수평적인 개념입니다. 또 길은 사람이 걸어가는 공간이라는 개념입니다. 사람이 걸어감으로써 길이 되기도 하고 길이 있어서 사람이 가기도 하고, 그런 개념이기 때문에 ‘도’는 처음부터 수평적이면서 실천적인 개념이에요. 그에 비해서 보편성은, 물론 여러가지 보편성이 있겠지만, 최초의 사례는 지난번 발제에도 나왔지만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이 아닙니까? 플라톤의 이데아는 저 천상에 있는 것이고 하느님 아버지도 저 하늘 높은 데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올라가야지 닿는 진리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도’와 ‘보편성’ 간에는 그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 얘기가 나오면서 종교의 기복성 문제가 거론됐는데, 복을 비는 일에 대해서 약간 첨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진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세속적 이익을 탐하는 마음으로 믿는 종교를 ‘기복종교’라고 하죠. 그런 의미에서 “원불교는 기복적인 종교가 아니다”라는 발언자3의 말씀은 옳고, 고등종교라는 개념이 좀 애매하긴 합니다만 모든 고등종교의 본질도 기복성을 뛰어넘는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의 본질은 그렇지만, 현실에서 기복성 쪽으로 기울어질 위험은 원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자 하는 것은 일체의 기복행위를 백안시하는 태도는 또 얼마나 타당하냐는 점도 성찰을 요하는 문제라는 겁니다. 기도가 없는 종교는 생각하기 어려운데 복과 은혜를 빌지 않는 기도가 가능할까요. 그런 의미의 ‘기복’마저 배격하는 것은 서구 진보주의자들의 세속주의를 진보의 표준으로 삼는 일종의 근대주의·서구중심주의가 아닐까요? 서양에서는 특히 진보사상이, 과학이나 진보적인 정치사상이 종교와 싸우는 데 굉장히 많은 정력을 쏟았고, 프랑스혁명에서는 가톨릭교회와 혁명세력의 치열한 대결이 있었죠. 맑스도 바로 그런 전통에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요. 서양의 맥락에서는 그것을 수긍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꼭 그런 종교가 없었잖아요. 요즘 와서 프랑스혁명기의 반혁명적인 가톨릭교에 비견할 만한 종교가 이 땅에도 생겨났다고 볼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종교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죠. 하여튼 종교문제도 우리 식으로 한번 생각해봐야 할 텐데, 근대주의·서구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종교를 봐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불교 용어로 하면 탐(貪)·진(瞋)·치(痴)를 여읜 깨끗한 염원과 기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복을 빌고 은혜를 빌더라도 그것이 자기의 탐욕이라든가 또는 누구에게 성내는 마음이라든가 아니면 어리석음에 입각하지 않은 깨끗한 기원과 기복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것을 생활화하는 것도 이중과제 완수에 필요한 마음공부가 아닐지 한번 문제를 제기해봅니다.

정교동심에 관해 발언자9, 발언자8 등이 공감했는데, 이 정교동심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제가 논문에서도 말했습니다. 이것이 실현되려면 정치도 바뀌고 종교도 바뀌어야 비로소 가능하지, 그러지 않고 정교동심을 말하고 말면 그냥 멋있는 구호지 실현은 참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정교동심을 말씀하신 원불교의 정산 종사는 물론 원불교가 진리적 종교라고 믿고 그 말씀을 하신 것이고, 장차 세워질 국가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입각한 국가라야 된다는 전제로 그 둘이 동심관계에 있을 것을 기대했고요. 내 논문에서 잠시 인용하는 간디도 ‘올바른 종교와 올바른 정치의 결합’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정치도 해야 하는데, 다만 다른 종교를 차별하지 않는다 하는 것을 다른 데서 그는 세속주의라고 표현했어요. 정교일치도 아니고 정교분리도 아니고 사실 정교동심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정치의 대개혁과 종교의 대쇄신을 전제로 하는 대단히 어려운 과제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페미니즘과 음양조화론

마지막으로 페미니즘 얘기를 하고 끝내려 합니다. 두번째 발제에서는 백아무개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부연설명을 해야겠어요, 나도 살아야 하니까.(웃음)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라는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가 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창비 2016)에서는 여성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반대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런 의미로는 백아무개도 분명히 페미니스트라는 점을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바입니다.(웃음)

반면에 성차별 철폐를 중·단기적 과제를 넘어 인간역사의 궁극적 목표로 설정하는 것을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상당수가 그렇게 설정하고 있는데, 그런 ‘페미니즘’하고 제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발언자8이 얘기하신 대로 내가 ‘남자로 태어난 인간의 남자다운 역할’을 중시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이게 페미니즘에 정말 어긋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페미니즘 논의에서 쉽게 수용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서 나는 성차별 철폐보다는 ‘음양조화’론이 낫지 않겠느냐고 얘기했다가 엄청 많이 얻어맞았고요.(웃음) 그러나 음양조화론을 시도 때도 없이 내걸고 나오지 않는 이상 당면의 성차별 철폐운동과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발언자7이 “궁극적인 목표를 ‘성의 조화’가 아니라 ‘음양의 조화’로 표현하는 것이 적실할까? 예컨대 인종차별 철폐의 궁극적 방향을 ‘인종의 조화’가 아니라 ‘색(色)의 조화’로 표현한다면 사회적 맥락을 넘어 너무 본질주의적이고 우주론적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닐까”라고 했는데, 저는 이 질문은 좀 이해가 안 돼요. ‘색’이라는 것은 물리적 현상이고 ‘음양’은 우주적 원리이긴 하지만 ‘이데아’ 같은 ‘본질’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남녀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에요. 보통 남자가 양이고 여자가 음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동시에 음양론에 따르면 남녀 개인의 신체 내부에도 음이 있고 양이 있고 그것이 조화가 돼야지 그 사람이 남자로서든 여자로서든 건강하게 생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말해서 양의 원리가 더 승하게 태어나는 남자, 대다수 남자가 그렇죠, 안 그런 남자도 있지만, 그런 남자의 경우 그렇게 태어났으면 그에 걸맞은 음양조화를 추구할 책무가 주어진다는 것은 원론적으로 가능한 입장인 것 같아요. 물론 구체적 내용으로 들어가면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요. 결과적으로 ‘너무 우주론적으로 가버릴’ 위험이 아주 없달 수는 없어도 신체의 의학적 진단 같은 차원을 포괄할 만큼 구체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음양조화론은 요즘 세상에 나 같은 노년의 남성이 제기하는 것이 좋은 처세법이 아니어서 자중하고 있습니다.(웃음) 그러나 음양론 쪽이 오히려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되 절대화하지 않는 미덕이 있어요. 예컨대 음양이 특정 개인에게 어떻게 투영되는가에 따라서 남자·여자 외에 제3의 성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고 태극에서 음양이 동격으로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동격이라고 하지만 태극기 봐라, 양이 위로 올라가 있지 않냐, 그게 뭐 동격이냐’ 그러는데, 우리 국기는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만 태극이라는 것은 옆으로 놓을 수도 있고 거꾸로 놓을 수도 있고 여러가지 방향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어쨌든 태극론에서 음양은 반반씩이고 동그랗게 서로 머금고 있는 것인데, 그걸로 알 수 있듯이 음양론에서 음과 양은 본질상 동격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현실사회에서는 또다른 문제겠지만요. 그래서 본질상 평등주의적 지향을 갖기 때문에 장기목표로서의 적합성이 있고 중·단기적으로도 성차별 철폐, 여성혐오 척결 운동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지 않나 하는 점은 연마해볼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한편에서는 지금 성차별이 이렇게 심한데 성차별부터 철폐해놓고 그다음에 장기목표를 생각하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일종의 근대주의적인 단계론이에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 이렇게 이중과제론으로 괜히 문제를 복잡하게 하지 말고 먼저 근대부터 성취하고 나서 근대극복을 하자, 그것은 근대주의적 단계론이며 이중과제론과는 다른 발상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냥 여성차별이 아니라 여성혐오가 굉장히 큰 문제가 돼 있습니다. 오늘날 만연된 여성혐오는, 내가 처음 하는 말은 아니지만, 여성권리의 신장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여성들에게 세상이 더 험해졌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전근대적 가부장사회는 남존여비를 제도화·관습화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비하가 아닌 여성혐오는 오히려 적었을 것 같습니다. 누가 실증연구를 해봐야겠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녀의 법률적 평등이 원리상으로 인정되고 현실적으로도 여러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이 확대될 때 ‘사내 못난 것들’의 여성혐오가 심해지고, 또 자본주의체제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인 성차별과 결합하여 여성혐오가 더욱 맹위를 떨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가부장제를 옹호할 의도는 없지만, 여성비하와 여성혐오는 백짓장 하나의 차이는 있다고 보는데 그 차이가 비교적 안정되게 유지되었던 것이 전근대적 가부장제였어요. 그것하고 여성혐오를 양산하게 되어 있는 근대의 성차별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근대 가부장주의도 서양의 고대와 중세가 다르고, 동아시아에서도 유교권과 유교권 바깥이 다르고 또는 유교사회 확립 이전이 다르고, 유교권 내에서도 나라마다 다르게 구현되어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여성억압이 유교적 가부장제보다는 상당부분 일본 천황제, 일본 제국주의 잔재에 해당하는 것이 많다고 봐요. 그런데 일본은 완전히 유교사회가 정착된 나라가 아니었거든요. 일본의 전통사회는 그 사회 나름의 성차별이 있었고 이게 군국주의로 가면서 굉장히 심해졌고, 그것이 한반도에도 상당부분 이식되어서 현재의 우리나라 성차별주의에는 그런 것들이 다 섞여 있는 것 같아요. 천황제의 유산, 유교의 유산, 또 자본주의 특유의 성차별주의, 그런 것을 좀 식별해볼 필요가 있죠. 물론 활동하기에 바쁜 사람더러 이런 것을 다 연구해보라고 하면 괜히 김 빼는 수작이 되겠지만 연구하고 담론을 펼치는 과정에서는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서양의 형이상학적 사고를 가부장제의 기본원리로 설정하는 일부 여성학 이론도 있습니다, 서양에서 특히. 그렇다면 서양의 형이상학적 사고 바깥에서 진행되어온 역사를 가진 동아시아에 이게 얼마나 적용될지도 점검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도 학문적 ‘진지전’의 일부가 아닐지 하는 물음을 던져봅니다.

 

  1. 백낙청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 근대와 근대성」, 강정인 외 『시민사회의 기획과 도전』(민음사 2016), 252~53면; Paik Nak-chung, “The Double Project of Modernity,” New Left Review 95, September-October 2015, 65면.

  2. 백낙청 「‘동아시아공동체’ 구상과 한반도」, 『역사비평』 2010년 가을호, 238면.

  3. 천관우 「민족통일을 위한 나의 제언」, 『창조』 1972년 9월호.

  4. 임동원 『피스메이커: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5년』(개정증보판), 창비 2015.

  5. 백낙청 「세계시장의 논리와 인문교육의 이념」,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창비 1994), 252~5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