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책머리에] 공안정국과 분단체제
문익환목사 방북 보도와 더불어 본격화된 이른바 공안정국으니 아직도 그 살기가 대단하다. 한때 수그러질 기미를 보이는 듯도 했었지만 또다른 방북 사건을 계기로 마치 영생이 담보된 느낌을 주는 형국으로 다시 바뀌었다. 과연 이 지겨운 나날은 끝없이 이어지려는가?
‘공안정국’이 비타협적인 통일운동·민중운동뿐 아니라 제도권의 야당과 자유주의적 명망가마저 ‘국가보안 차원’으로 다스리는 시국을 뜻한다면, 그것이 항구적일 수 없음을 장담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권 스스로가 자신의 수명연장을 위해 다시금 타협과 조정의 국면을 열어나가든가, 아니면 공안정국의 꿀맛같은 날들을 항구화해버려다가 오히려 ‘6공청산’의 날을 재촉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요즘 돌아가는 꼴로는 후자쪽의 우려 또는 희망도 품어봄직하지만, 3·4·5·6공을 면면히 꾸려온 나라안팎 세력들의 관록을 감안할 때 섣불리 파국을 내다볼 계제는 아니지 싶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작금의 공공연한 탄압선풍이 일단 가라앉는다 해도 좀더 본질적인 의미의 공안정국은 지속되리라는 점이다. 이번의 탄압국면 자체가 올림픽 이전부터 기약되었던 일이요, 문목사 방북 이전에 중간평가 연기와 농민운동·노동운동에 대한 강경진압을 신호로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민중의 생존권투쟁과 민족의 자주적 욕구가 있고 ‘전교조’ 가입자들의 운명이 어찌 되든 전교조운동의 실체가 남는 한, 여야관계가 지금보다 부드러워진다고 해서 정권의 위기의식이 가셔지기는 힘들다. 분단체제는 본질적으로 공안체제이며, 적나라한 공안정국과 눈가림하는 공안정국이 대거리하면서 유지되는 체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분단체제를 넘어선 삶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탄압국면이든 유화 국면이든 모두가 반세기 가까이 그야말로 지겹도록 존속해온 공안체제의 실상을 일러주는 산 경전들이다. 단지 그것을 제대로 읽는 법이 아직도 분명치 않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 체제는 기왕에 글로 된 교과서에서 찾아보지 못한 분단체제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막연한 통일열망이 아니라 보편성을 지닌 과학의 원리에 따라 읽어냄으로써만 극복될 분단체제인 까닭이다. 그리고 이러한 ‘읽기’는 단순한 지식의 차원을 넘어선 참된 지혜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력하나마 본지가 이제껏 펼쳐왔고 앞으로도 정국의 기복에 구애받음 없이 추진하려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의미의 ‘분단체제 바로 알기 운동’이다. 이때의 ‘바로 알기’가 곧 진정한 문학작품이 요구하는 ‘지혜로운 읽기’와 상통한다는 점이 문학중심의 잡지를 만드는 우리의 남다른 긍지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일에서 과학적 인식이 중요함은 더말할 나위 없다. 남북에 걸친 하나의 ‘분단체제’라 해서 그것이 두 개로 분단된 사회를 망라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면, 그중에도 우리가 사는 남쪽 사회의 기본적인 모순에 대한 정화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다. 다만 진정으로 과학적인 인식은 남쪽의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분단을 통해 성립했고 어떻게 분단체제의 일부로서 그 특이한 종속적 발전의 길을 걸어왔는지의 실상을 읽어내야 할 것이며, 북한의 전혀 다른 사회구성체 역시 어떻게 분단을 거치며 성립했고 어떻게 그 나름의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분단체제에 얽혀들어 있는가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한반도의 이러한 분단체제가 전세계적 규모로 냉전체제 속에서 정확히 어떤 몫을 맡고 있는지도, 우리의 실천적 앎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몇 달 공안정국의 홍역을 치르면서 우리가 절절히 느낀 바는, 분단체제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겠다는 점이다. 목전의 공안통치 종식에 치중하는 협의의 민주화운동과, 장기적 공안체제의 계급적 본질을 폭로하는 민중운동, 이 공안체제가 외세에 기댄 분단체제임에 주목하는 자주화운동 및 그 일환으로서의 ‘북한 바로 알기 운동’, 이런 각각의 운동들이 분산되고 심지어 반목하면서 어느 하나의 진출이 다른 부문의 위축을 가져오는 상황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이땅에서 인간다운 삶을 기대하기가 힘들 게 뻔하다. 하지만 전체를 한눈에 보는 지혜 없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한몸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
본지가 70년대부터 제창해온 민족문학이 이처럼 분단체제를 바로 알고 올바르게 대응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이야기다. 또한 근년에 우리나름의 이바지를 해온 한국사회성격 논쟁이나 사적 유물론 논쟁 들이 모두 일관된 관심의 소산이었음도 명백하리라 믿는다. 특히 지난호에는 다섯명의 소장평론가들이 참여한 ‘지상토론’을 통해 민족문학 논의와 철학·역사학·사회과학 분야 논의들의 연관성이 한층 부각되었다고 믿는다. 지상토론의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성이 좀 부족했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대체로 중요한 문제들을 두루 제기하여 그 정리에 큰 도움을 주어다는 호의적인 반응이 많았다. 본지는 앞으로도 이따금씩 비슷한 토론을 마련할 생각이며 그밖에 개별 평론, 좌담, 서평 등 갖가지 형태로 이 논의를 계속하고 진전시키고자 한다.
지난 호 지상토론에 본지 편집진이 빠졌던 것은 원래 계획이 그랬던 때문이지만, 이번호에 본격적인 후속논의를 보태지 못한 것은 우리의 태만 탓이라고 할 밖에 업다. 그대신 편집위원 중 한 사람이 주재한 좌담 「통일을 생각하며 북한문학을 읽는다」에서는 분단체제를 바로 알고 북한을 바로 알기 위해 북한의 문학작품을 자상하고도 냉철하게 읽고 토론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무더위에 그 책들을 다 읽었을 뿐 아니라 갖가지 금기의 지뢰밭 같은 이 분야에서 깊이있는 토론을 마다않은 참석자 여러분의 성의와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뒤이어 실리는 평론들 역시 좌담의 관심사를 직접간접으로 계승하고 있다. 빼어난 중견시인이자 얼마전에 평론가로서 ‘공식 데뷔’ 절차까지 밟은 이동순씨가 문익환·김준태·안도현의 신작시집을 읽으며 「분단시대 시의 꿈과 정치적 신화」를 논했고, 정남영씨의 「민족문학과 노동자계급문학」은 여름호의 지상토론에 곧바로 이어지는 글이다. 계급적 관점을 지닌 민족문학론 내부의 쟁점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생략된 아쉬움이 있지만, 명백한 당파성의 주장과 섬세한 작품읽기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리라고 믿는다. 한편 정호웅씨의 『두만강』론은 좌담에서도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킨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으로서 좌담과의 흥미진진한 상호보완을 이룬다. 게다가 서평 가운데도 박희병씨의 「북한 학계의 사실주의 논쟁의 성과와 문제점」이 바로 연관되는 주제이고 『문』에 대한 성민엽씨의 평 역시 어울리는 글이다. 반면에 김승희·홍영철 시집들을 다룬 곽재구씨의 서평은 민중민족문학 진영에서 더러 발견되는 편식성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리라 본다. 세 편 모두 짤막한 평문의 솜씨로도 돋보이는 글이 아닌가 한다.
문학 이외의 분야에서 이번호는 몇가지 예정이 어긋나는 바람에 양이 꽤 줄었다. 그러나 내용의 일관성이 그만큼 더 두드러진 면도 있다. 지난 봄호에 원산 총파업 60주년 기념논문을 기고했던 김경일씨의 이번 글은 일제하 노동·농민·학생운동에 대한 북한 학계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 글에 소개된 논문들은 창비신서(94) 『북한 학계의 1920,30년대 노농운동 연구』로 묶여져 나올 예정이다. 구승회씨의 「맑스주의 역사법칙논쟁 비판」은 필자가 멀리 독일로부터 투고해준 글로서 본지 복간호에서 61호에 걸친 논쟁이 집필의 계기가 되었음을 그 자신이 밝히고 있다. 애초에 우리 생각은 이 문제에 대해 입장이 다른 두 편의 글을 더 받아서 함께 싣는 것이 독자에게 한결 흥미롭고 또 편집의 군형에 맞겠다 싶었으나. 사정상 이번에 구승회씨 글만 먼저 내보내고 겨울호에 연속논의를 마련하기로 했다. 겨울호 이후로도 본지의 청탁에 의해서뿐 아니라 많은 분들의 투고나 ‘독자의 편지’ 등을 통해 이 토론이 활발히 지속되기 바란다.
본격 논문 외에 최중욱씨의 『철학대사전』 서평과 류청하씨의 「학생운동사 서술의 제문제」가 크게 보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공안정국의 직접 피해자의 하나인 민족미술계의 어려운 고비에, 유홍준씨가 ‘민족미술10년’을 평가·정리하는 시평을 써주어 이 분야에 남달리 관심있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면서 민족문학논의를 여타 분야의 토론과 연결짓는 본지의 작업에 귀중한 보탬을 해놓았다.
공교롭게도 이번호는 소설 또한 비평적 논의들과 밀접히 이어지는 내용으로 맞춰졌다. 공교롭다고 한 것은, 본지가 본지나름의 뚜렷한 문학관을 갖고 작품선정을 하고는 있지만 소재 위주의 기획은 전혀 생각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진작가 최일남선생으로부터 김향숙·정화진씨에 이어 신인에 이르기까지 연배의 구색도 맞았으려니와, 남북관계, 권력층 가정과 운동권 벗들 사이에 놓인 젊은이의 갈등, 노동운동 현장, 좌익 장기수들의 삶 등 우리 현실의 절박한 문제가 골고루 다루어졌다. 특히 김하기씨의 투고작품 「살아있는 무덤」은 충격적인 보고문학의 성격도 겸하면서 이 시대 우리 민족의 삶, 더 나아가서 인간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은 생각하게 해주리라 믿는다.
시에서도 이번호 ‘신인투고’란은 특별히 눈을 끄는 바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황구의 비명』과 『신궁』의 소설가요 『만선』의 극작가인 천승세씨가 오랫동안 혼자서 닦아온 시작업을 공개하면서 여느 투고시인과 다름없이 평가받기를 자청해온 것이다. 채택된 10편의 개성짙은 시에 대해 독자들의 많은 관심이 기대된다.
그밖에 윤삼하·송기원·고재종·허수경 네 분의 옥고가 모두 시를 아끼는 독자들의 좋은 읽을거리가 되리라 믿는다. 특히 허수경씨는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통해 일찍부터 자기 목소리를 들려주어 시단의 주목을 끌었는데, 이번에 처음 시도한 530행의 특이한 장형 서정시를 기고해주었다. 한편 고재종씨는 두 번째 시집 『새벽 들』을 올가을 ‘창비시선’으로 상재할 예정이며, 올해 회갑을 맞은 임강빈선생의 기념시집 『조금은 쓸쓸하고 싶다』와 고정희씨의 장시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이은봉 시집 『봄 여름 가을 겨울』, 서홍관 시집 『어여쁜 꽃씨 하나』도 함께 출간됨을 소개한다.
끝으로, 지난호 브루스 커밍스의 논문 번역에서 ‘에이치슨’은 ‘에치슨’이 맞는 발음이므로 뒤늦게나마 바로잡는다.
『창작과비평』1989년 가을호 책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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