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창비 책머리에] 넓은 시야와 올곧은 심지로

급변하는 세계와 발맞추기 위해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된다고 요즘 누구나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시야를 넓히다보면 어지럼증을 느끼는 일도 흔하다. 세계가 그야말로 급변하고 있어서도 그렇지만, 넓은 세상의 존재를 실감하는 일 자체가 이제까지의 삶의 바탕을 온통 흔들어놓고 아득한 심연을 들여다볼 때와 같은 현기증을 일으키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만성이 되어 현기증이 좀 덜해지면서는 저도 모르게 들뜬 기분이 체질화되기도 한다.

딱이 세계사적 사건이나 경제와 첨단기술의 발전들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시야를 넓힌다고 할 때 어지럼을 느낄 까닭은 너무나 많다. 아니,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지식이나 문학·예술 작품에서 이루어진 축적을 접할 경우에 오히려 더 심하다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자신의 앎이 모자라고 힘이 부치다는 새삼스런 실감으로 아찔하고 어지러운 순간을 겪은 바 없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시야를 넓혀본 사람이 아닐 터이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우리는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단전에 힘을 모아 흔들리는 심지를 다잡아야 한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며 남의 종살이를 면하는 길이 달리 없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가다듬고 둘러보면, 우리보다 훨씬 많이 알고 넓은 세상에 익숙하며 세계의 주인행세마저 하고 산다는 사람들도 거의가 멀미를 앓거나 정신없이 들뜬 삶을 살고 있음이 눈에 띌 듯하다. 아니 ‘시야의 확대’라는 구호 자체가 이 들뜬 기분을 유지하고 종살이 세상을 지속시키는 편리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혐의마저 잡힌다. 그렇다고 좁은 시야에 갇혀 지냄으로써 험한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종살이를 모면할 것은 더욱 아니다. 결국 시야를 넓히는 순간순간마다 새롭게 심지를 굳히고 더욱 올곧게 세우는 과정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사는 인간에게나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1993년의 첫 호이자 복간 5주년 기념호가 되는 이번 호를 내면서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창간 이래 내내 그러했지만 특히 복간 이후 최근의 세월로 올수록 이 문제가 한층 절실해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87년의 항쟁과 그에 힘입은 88년의 복간 뒤에도 우리는 인신구속과 압수수색 등의 탄압을 겪었고 주변에서는 더 심한 사례조차 많았지만, 대체로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력의 위험이 줄어들면서 ‘시야의 확대’ 또는 ‘발상의 전환’에 쫒긴 자기상실의 위험이 더 커지는 세월이 되었다. 소련·동구사회주의가 몰락한데다 최근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국내의 민족민주운동 또한 심각한 곤경에 처함으로써 그 위험은 바야흐로 절박하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시야의 확대가 창간 이래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해온 과제였으며 그것이 일시적인 유행에 휩쓸리는 일이나 만성적인 들뜸이 아닌 진정한 시야의 확대가 되도록 우리 나름의 마음공부와 다소의 고행을 마다않았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를 느낀다.

이런 자부심이 자만이나 자기만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창비’를 지키고 키우는 일에 우리 자신과 ‘창비’를 아껴주는 모든 분들이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각오로 나설 고비라고 믿고 있다. 계간지와 출판사의 형편 자체는 창간 당시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자리가 잡혔고, 불경기로 허덕이는 동업들의 근황에 비해도 행복한 처지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시장의 규모와 경쟁의 살벌함 그리고 어지러워가는 세태 전반을 계산에 넣을 때 – 다시 말해 사업 차원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시야 확대를 하였을 때 – 우리가 이제까지 이룩한 것을 제대로 지켜내는 일조차 결코 순탄하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독자들께서도 현재 진행중인 ‘정기구독회원대모집’에의 호응과 잡지 내용에 대한 ‘독자의 편지’를 통한 참여 등 크고작은 일을 가림 없이 배전의 성원을 주시기 바란다.

자기를 잃지 않고 시야를 넓혀나가려는 노력의 하나로 이번 호에서는 ‘세계 속의 동아시아’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이는 한 차례의 특집으로 끝내려는 것도 아니고, 연중 내내 또는 해를 넘겨서까지 후속 논의를 게재할 생각이다. 그 취지는 권두대담에서도 언급하고 특집 필자들도 더러 밝히고 있듯이 무슨 동아시아주의를 새삼 주창하려는 게 아니라, 국내 및 한반도의 우리 문제를 한층 세계적인 시각으로 보되 세계의 문제를 우리에게 좀더 근접한 문제로 구체화해서 보는 훈련을 쌓으려는 것이다. 최원식씨의 「탈냉전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을 비롯하여, 미국과 일본의 역할 및 구상을 각기 다룬 이삼성·이종원 두 분의 논문, 그리고 동아시아 나라들의 역사적·현실적 상호연관의 실상을 점검한 고병익 선생의 글과 ‘아시아·태평양권’이라는 개념을 참신한 안목으로 살펴본 아리프 딜릭의 기고 등으로 일단 그럴듯한 출발이 되었다고 본다.

고은 시인과 본지 편집인이 새해에 만난 대담에서는 대선 이후 ‘문민시대’의 개막을 앞둔 시국에서부터 분단체제와 연방제, 세계질서와 민족문학 운동 등 다양한 화제가 오르내린다. 그중 동아시아에 관해서도 적지않은 지면이 할애되어 특집과 상호보완되는 바 있을 것이다. 서로 보완되기로는, ‘지역감정’ 문제를 분석한 조희연씨의 글과 멀리 독일에서 자기 나라 통일의 의미를 한국 독자들을 위해 점검해준 하이데 교수의 특별기고, 그리고 지난 일년여 동안 본지에 소개된 번역논문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유팔무씨의 글 또한 특별한 관심거리가 될 것이다.

특집에 비해 문학평론을 좀 소홀히했다는 비판이 나올지는 모르겠다. 최근의 소설과 리얼리즘 문제를 다룬 평문이 본지의 다음호 구상과 관련하여 미루어진 점도 그런 인상을 더해줄 수 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나는 김사인씨의 글과 함께 이선영·도정일 두 교수의 옥고를 얻었고, 이시영·김태현·임규찬씨의 서평들을 동시에 감안한다면 뜻있는 수확이 있었다 해도 좋을 듯하다.

창작품으로도 단편소설 딱 두 편인 것은 아쉽지만 송기원씨가 오랜 침묵 끝에 내놓은 「아름다운 얼굴」이나, 「풍금이 있던 자리」 등 근년의 빼어난 성과에 이어지는 신경숙씨의 「모여 있는 불빛」은 둘다 독자를 사로잡는 바 있을 것이다. 시의 경우는 질과 양 모두 자랑할 만하지 않은가 한다. 신경림·조태일씨를 위시한 열한 분의 작품인데, 근작 7편을 보내준 김지하씨와 오랜만에 활동을 재개한 하종오씨, 정희성·박남철·고형렬·서홍관 제씨와 신진 아닌 신진 천승세씨, 명실상부한 신예 김기택씨, 평론가 및 영문학 교수로는 알려진 지 오래나 시단에서는 신인이나 거의 다름없는 김영무씨 등 쟁쟁한 필진이다.

내용의 충실을 앞세우면서도 어떻게든 독자에게 좀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잡지가 되는 일이 우리의 변함없는 연구거리다. 좋은 서평을 싣는 것이 그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늘상 생각해왔는데, 이번에는 아예 ‘짧은 서평’이라는 별도의 갈래를 만들어보았다. 처음이라 세 편밖에 못 마련했지만, 길고 짧은 서평 일곱 꼭지(앞서 문학평론과 관련해서 언급한 세 분 위에 심재기·조동걸·백영서·이준식씨가 등장한다]가 김영혜씨의 ‘문화시평’과 함께 모두 독자의 눈길을 모음직하다고 믿는다. 또한, 교정에도 정성을 다하겠다는 다짐의 또다른 표현으로서, 지난 호의 오식을 바로잡는 난을 새로 만들었다. 여기서도 놓친 잘못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가차없는 꾸짖음을 주시기 바란다. 독자들이 좀더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이번 호부터 독자용 엽서의 형식도 조금 바꾸었다.
편집자문 진용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김종철·이병천 두 분이 각기 몰두하는 일들 때문에 자문위원의 직함은 사퇴하기로 했고 대신에 소설가 현기영(玄基榮)선생과 서양사학 전공의 유재건(柳在建)교수가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의 합류를 계기로 기존의 편집위원·자문위원들 모두가 더욱 넓은 시야와 올곧은 심지로 지극한 정성을 담은 잡지를 만들어나갈 것을 약속드린다. [백낙청]

 

『창작과비평』1993년 봄호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