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책머리에] 드디어 다가온 ‘올림픽 이후’
한동안은 조물주가 우리 한국민을 점지할 때 올림픽을 열심히 기다려서 훌륭히 치르라고 만들어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으나. 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언제 그랬던가 싶은 생각이 들게 된 사람이 차라리 많은 것 같다. 아니, 지금의 이 ‘올림픽 이후’야말로 우리가 열심히 기다려왔고 훌륭히 치러야 할 결정적인 역사임이 처음부터 분명했다는 점이 새삼스레 기억나기도 한다. 직선제 개헌이나 개헌논의 같은 중대사는 올림픽 이후에나 하자고 우겨대던 논리도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좀더 가까이는, 제5공화국의 범죄적 유산을 올림픽을 마친 뒤에나 본격저으로 다룬다는 야당쪽의 정치일정이나 그때 가면 ‘체제전복세력’을 철저히 단속하겠다는 집권층의 다짐 또한 그런 뜻이었다. 이처럼 모두가 기다리던 ‘올림픽 이후’가 우리들이 살아 숨쉬는 현재의 역사로 드디어 다가온 것이다.
이 역사를 올바로 살자면 그 바로 앞의 역사로서의 ‘88올림픽’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평가가 필요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대국적인 평가에 앞서 그 역사의 일부였음이 분명한 ‘올림픽 기간의 나 자신’에 대한 각자의 점검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지난호 책머리에에서 말한 대로 올림픽의 의미가 결코 단순치 않은 것이라면,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 또한 다소간에 착잡해지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그 ‘성과’에 대한 흥분과 자랑스러움이 앞섰건 ‘단독 올림픽’ ‘반민중적 올림픽’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 앞섰건 자신의 감정에 무엇이 어떻게 뒤섞여 어디로 기울어졌는지 한번 냉철히 돌이켜볼 일이며, 어느 한쪽으로 아무 뒤섞임 없이 흘렀다고 하면 그것이 잘된 것이었는지도 따져볼 일이다.
올림픽 자체의 성과와 문제점은 아마도 이런 정직한 자기점검 위에서만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성질일 것이다. 그 화려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세계가 다 모이다시피 하면서 북한의 동족들은 배제된 놀이마당이었으며 남한 내에서도 주로 있는 사람들의 잔치였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한 모든 당사자들의 응분의 역사적 책임을 우리는 두고두고 물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이런 한계 안에서 올림픽이 거둔 엄연한 성공을 굳이 외면하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책임추궁과 무관한 일이다. 입으로는 ‘민족의 저력’ 운운하면서 그 열매는 행사를 주관한 자들이 가로채려는 속셈이 나쁜 것이지, 온갖 한계 속에서도 민족의 저력이 또 한번 드러났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도대체 88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릴 수 있었던 것 자체가 87년 6월의 민중승리 덕분이었으며, 행사장의 화려함은 그대로 우리 국민의 피땀이었다. 그리고 일사적인 스포츠 열기가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영영 마비시키리라는 생각은 그것이 위정자의 희망이든 비판적 지식인의 우려이든 결국 민중을 얕잡아보는 태도이다. 바로 얼마 전에도 86 아시안게임을 화려하게 치렀으므로 매사가 뜻대로 되리라고 기대한 무리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던 것이다.
과연 우리 민중은 이제 ‘올림픽 이후’를 맞아, 올림픽 때 집권자들이 추켜세우던 ‘성숙한 역량’을 이른바 5공비리의 폭로·척결과 민족분열의 진정한 극복에 돌리려 하고 있다. 오랜만의 국정감사와 청문회 활동 등을 통해 부분적인 진상이나마 벗겨지기 시작한 것도 결국 국민의 열화같은 다그침에 말미암은 것이며, 정부가 공약한 ‘북한 자료 개방’조차도 아직껏 정부의 탄압을 무릅쓴 지식인·출판인들이 제 돈 들여가며 수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쨌든 이제는 올림픽으로 인한 정권측의 부담도 사라진 마당이지만, 민중이 겁먹거나 주춤거릴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민중의 열기와 저력을 올바로 이끌어갈 정확한 길잡이가 아쉬운 상황이며,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자료, 새로운 진상들을 차분히 정리하는 노력이 더욱 요긴해진다. 본지는 이 ‘올림픽 이후’의 국면에도 시대의 열기에 한껏 동참하면서 동시에 계간지의 특성을 살려 차원 높은 종합과 정리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번호로 복간 후 네 권, 4계절을 채우게 된다. 복간 당시의 흥분이나 설레임은 사그러들었지만 여전히 한 호가 새삼스러운 것은 석달마다 한 권의 책을 꾸미는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은 때문일 것이다. 목차상의 짜임새와 한편 한편 글의 충실성을 함께 갖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지는 않되 굳이 꼬집어 말하라면 한 페이지도 버릴 것이 없는 충실함 쪽을 택하자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이번호에서도 풍성한 읽을거리를 마련하고자 애써보았다.
무엇보다도 커다란 수확은 우리 소설문학을 다룬 다양한 글들을 얻을 수 있었던 점이다. 작가 황석영씨가 기고한 「항쟁 이후의 문학」은 80년 광주항쟁 이후 지금까지의 우리 문학 전반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꿰뚫어보면서 최근 소개된 재외작가의 작품들과 북한의 문학예술들도 아울러 살피고 있다. 그의 매력적인 필치와 함께 국경을 넘나들며 토로되는 진정한 민족의 문학·예술에의 지향은 독자를 사로잡기에 모자람이 없다 하겠다. 이어지는 최원식 교수의 평론은 이른바 ‘반미문학’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높여주는 성과이며, 빨치산 수기와 소설을 분석한 황광수씨의 글 또한 출판게의 화제작들에 대해 역사해석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 대중소설을 포하하여 수십 편의 우리 소설을 대상으로 타끼자와(瀧澤秀樹) 교수의 글과 일제 초기를 다룬 강명관씨의 논문, 그리고 ‘문학계동향’ 및 강형철·김종철씨의 서평들을 보탠다면 이번호의 문학 논의는 가히 사적 인식과 시야의 확대에서 유다른 풍요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잡지의 역할은 묻혀진 자료더미에서 새로운 의미를 캐내는 데서도 몫이 있거니와, 임형택 교수가 새로 찾은 다산(茶山)의 서사시를 소개하면서는 민중의 현실에 뿌리를 둔 그의 사상을 돌아보게도 된다.
이번호에는 박두진·정희성·황지우씨의 시작품과 송영씨의 단편으로 창작란을 구성하였고, 또 세분의 신인작품을 선보이게 되었다. 신인 중 김영씨는 빨치산 활동의 역사적 체험을 안고 있는 분으로, 예순을 넘긴 노령에도 불구하고 맑은 심성으로 현실에 뿌리박은 문학에의 열정이 식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강세환·김한수씨는 각기 자기세계를 갖춘 패기있는 분들이며, 특히 노동자 2세의 성장과정을 그린 김한수씨의 작품은 ‘노동자의 눈’으로 현실을 객관화하면서 분량에 걸맞는 무게와 건강함에도 도달하고 있다.
또한 이번호에서는 13년만에 부활된 만해문학상과 제 7회 신동엽창작기금 수상자를 발표하는 기쁨을 안게 되었다. 독자들과 함께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 더욱 빛나는 민족문학의 업적을 기대하는 바이다.
철학·역사학을 위시한 북한의 학술적 성과들은 정부의 ‘공개’ 방침에 앞질러서 소개된 바 있고 앞으로는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한국 근대사회의 성격에 관한 북한학계의 논쟁을 정리한 이병천씨의 글은 단순한 소개에 머물지 않고 남한 논의의 성과 위에서 날카로운 분석을 가하고 있다. 이 글이 남북간의 학술적 교류의 시도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 『창비』 57호가 하나의 발단이 된 한국사회성격논쟁이 한반도 전체로 확산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 글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대학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대학의 진정한 ‘주인’ 입장에서 심층적으로 파헤친 권두좌담 「새로운 대학공동체의 모색」을 비롯해서 최근 증권시장의 팽창현상을 분석한 전철환씨의 글, 그리고 조순경씨의 글 등이 모두 우리의 인식을 심화·확대시켜줄 것이다. 또 모처럼 시사적인 주제를 다룬 임삼진씨의 시론은 노동운동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너무나 ‘화려하게’ 드러나는 5공비리에 가려 자칫 소홀해질 수 있는 반민주악법 개폐에 대한 주의환기를 위한 의미도 갖는다.
이렇게 욕심대로 담다보니 더 줄이려던 책의 부피가 오히려 늘어나고 말았다. 그러고도 다음호로 미루어진 원고가 있으니 아직도 우리의 편집감각이 미숙한 탓이다.
『창작과비평』 1988년 겨울호 책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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