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책머리에] 무엇을 어떻게 ‘새로 생각’할 것인가
고르바초프가 ‘신사고’를 제창한 이래 우리 사회에도 그 말이 심심찮게 퍼졌고 제법 신선한 충격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3당합당 사업의 급속한 희화화가 보여주듯이 ‘신사고’를 내세운다고 반드시 새로움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민자당처럼 뻔한 경우는 차라리 예외에 속하거니와, 구사고 중에도 그야말로 케케묵은 낡은 사고, 낡은 습성들이 ‘신사고’의 허울을 쓰고 재생되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사실 제대로 생각한다는 것은 언제나 새롭게 생각하는 것, 끊임없이 새로 생각하며 또한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사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런 점에서 신사고란 사람살이 일반의 항시적인 임무인 동시에 누구나 피하고 싶은 자신과의 고통스러운 싸움이기도 하다. 입으로 신사고를 부르짖으면서 몸은 낡은 사고 속에 안주하려는 항시적인 유혹이 있는 것도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낡디낡은 반공이데올로기에 억눌려온 우리 사회에서, 80년대 후반 그 억압을 깨며 터져나온 새로운 소리들 중에는 실상 그다지 새롭지 못한 것 또한 많았다. 하지만 우리 상황에서는 구사고의 복원조차 신사고 수행의 필요조건이었던 면이 없지 않았는데, 이제 소련과 동구의 격변이나 국내정세의 급박한 전개는 바야흐로 진정한 신사고 그 자체를 요구하고 있다. ‘현실직시’의 이름으로 현실을 추수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낯익은 타협주의나 속물주의도 아니요 변화가 눈부실수록 낡은 갑옷의 무장만 더욱 단속하는 무모함도 아닌, 굳은 심지와 유연한 정신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한 것이다.
창간 이래 우리가 줄곧 문학의 터를 중심으로 우리나름의 사상적 모색과 사회과학적 탐구를 지속해온 것이 신사고 본연의 그러한 요구와 일치했던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물론 문학중심 잡지이다 보니 못 건드리고 넘어간 일감도 많고 편집진의 과오와 불민 때문에 그르친 일들은 더욱이나 많다. 하지만 오늘날 곳곳에서 ‘난국’을 염려하는 가운데도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이론 아니면 어지러운 세상을 좇아 너무나 쉽사리 변신하는 또다른 낡은 사고들이 있을 뿐 이렇다할 타개의 지혜가 아직 못 나온 데에는, 애초부터 생각의 새로움을 감정의 새로움, 삶 자체의 새로움과 불가분의 것으로 설정하는 문학 고유의 – 그러나 문학인만의 것은 결코 아닌 – 변증법적 사고가 아직껏 제대로 열매맺지 못한 탓이 크다고 하겠다.
이번호도 우리는 이런 ‘구태의연한’ 소신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흔히 들어온 말처럼 이번에도 무언가 한눈에 확 끌리는 차림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사실 바깥세계의 눈부신 변화에 대해서든 4·19 삼십주년, 5·18 십주년의 시점에서 노동자탄압·언론탄압이 가중되고 경제파탄설까지 난무하는 국내정세에 대해서든 우리가 응분의 대응을 했달 수는 없다. 그러나 수록하는 한편한편마다 우리나름의 정성을 담아 새로운 사고의 진전에 남 못하는 이바지를 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공감하는 독자도 적지 않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권두의 좌담 「오늘의 사회주의와 맑스주의의 위기」는 말할 나위 없이 오늘날 초미의 관심사를 다루고 있어 일단 독자의 눈을 끌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무엇을 어떻게 새로 생각할지에 대해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해답을 찾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진지하고 개방적인 토론, 다양한 목소리의 상호점검을 시도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스딸린주의 문제로부터 사회민주주의 문제, ‘맑스주의의 위기’, 제3세계 변혁운동과의 연관성 등을 장장 여덟 시간에 걸쳐 토론한 이번 좌담이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믿는다. 수고해주신 네 분의 참가자, 특히 이 좌담을 기획·주관해준 이병천교수께 감사드린다.
지난호 시작한 연속기획 ‘한국사회 계급론의 쟁점’에는 이영희(李榮熙)씨의 「‘과학기술혁명’과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내보낸다. 좌담 주제와도 직결된 목전의 지대한 관심사를 다루면서, ‘과학기술혁명’ 개념의 무비판적 수용에 제동을 거는 뜻있는 논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 글의 ‘비판적 검토’로써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은 아니고 진지한 반론을 포함한 더욱 활발한 논의가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박승옥씨의 「7·8월 노동자대투쟁을 다시 생각한다」도 현대중공업과 KBS의 투쟁이 불붙은 현시점에서 특히 주목을 끈다. 87년 여름의 획기적인 노동투쟁에 대한 상세한 점검과 날카로운 논쟁적 문제제기를 담은 이 글이 노동운동·민중운동 논의의 진전에 좋은 자극이 되리라 믿는다. 한편 임영태씨의 「남북한 사학사의 비판적 검토」는 일제시대부터 최근까지의 우리나라 역사학을 총점검하면서 북한의 사학사도 처음으로 함께 살펴보았다는 각별한 뜻을 지닌다. 4·19 기념논문집에 대한 박세길씨의 서평과 함께 우리 현대사의 재인식에 기여할 것이다. 또한 강문구씨의 「니까라과 혁명이행기의 정치경제학」도 좌담의 주제와 직결된 흥미있는 논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면서 정작 아는 바는 단편적인 보도의 수준에 머물기 십상인 니까라과혁명에 대해 심층적인 사례연구와 더불어 정치경제학적 시각을 적용하고 있음이 흥미를 더해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호는 문학작품들이 충실해서 흐뭇하고 자랑스럽다. 김만옥씨의 「아버지의 작고 검은 손금고」가 단편의 묘미를 오랜만에 맛보게 해주는가 하면, 최근에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독서계의 관심을 끈 김영현씨는 「우리 청춘의 푸른 옷」에서 더욱 원숙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300매가 넘는 중편 「노역장 이야기」를 기고한 김하기씨는 작년 가을호에 「살아있는 무덤」으로 첫선을 뵌 신인으로 독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을 터인데, 그가 충격적인 진실의 단순한 보고자를 넘어 소설가적 재능도 뛰어난 작가라는 점을 이번에 거듭 실감하게 된다.
시에서도 반가운 얼굴, 귀한 글들을 많이 만난다. 「휴전선」과 『황지의 풀잎』의 시인 박봉우씨는 지난 3월 타계하여 다시 못 볼 얼굴이 되고 말았지만, 열네 편의 유고를 실을 수 있어 유가족과 나누는 우리의 슬픔이 다소나마 달래어진다. 게다가 정희성시인이 오랜만에 독자의 목마름을 적셔주었고, 본지 88년 겨울호에 등단한 강세환시인의 모습도 반갑다. 정세훈씨는 『노동문학』을 통해 나온 노동자시인으로 그나름의 조용한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시간 여행」 등 여러 편의 시를 투고해준 육봉수씨는 섬세한 감수성과 강건한 의식을 아울러 갖춘 노동시인으로 기꺼이 추천할 수 있겠다. 여기에 이시영시인의 신작 여섯 편까지 함께 싣는 우리의 기쁨은 남다르다. 알다시피 그는 창비사 주간으로서 황석영씨의 북한방문기가 본지 작년 겨울호에 실린 책임을 지고 구속되었는데, 몸이 풀려났을뿐더러 시심도 건재함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평론 분야에서는 서경석씨의 「『태백산맥』론」과 김창주씨의 「맑스주의 미학의 제문제」를 실을 수 있었으나 시·소설만큼 풍성하게 꾸미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지면 사정으로 부득이 미루어진 글도 있고, 지난호의 ‘90년대 민족문학을 위한 제언’ 특집과 다음호에 문학좌담 등 이 분야의 여러 기획들 사이에서 불가피해진 면도 있다. 그러나 신간 시집과 장편소설들에 대한 신경림·김태현씨의 서평과 국문학계의 노작 『열하일기 연구』에 대한 김영교수의 평가, 그리고 근래 나온 과학서적들을 폭넓게 소개하면서 과학도서 출판의 현황을 점검한 ‘과학세대’ 동인들의 글, 「파업전야」와 「우묵배미의 사랑」 등 화제의 영화 두 편을 다룬 이효인씨의 문화시평 들이 어울려 그런대로 알찬 읽을거리가 있지 않은가 싶다. 특히 신경림씨의 서평은. 쉴새없이 간행되는 신작 시집들을 중진시인의 일관된 안목으로 가려보는 것도 독자에게 유익하리라 싶어, 한 일년쯤 고정 평자로 집필해주기를 부탁드렸고 흔쾌한 응낙을 받았다.
『창작과비평』1990년 5월 봄호 책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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