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책머리에] 역사의 큰 물결과 작은 소용돌이
요즘 우리 사회의 민주세력이 당하고 있는 대대적인 탄압을 ‘작은 소용돌이’로 표현한다면, 너무 안이한 정세판단이거나 공연한 허장성세라고 비난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이땅에서 ‘좌경척결’을 완수하고 5공식 ‘자유민주체제’를 정착시키는 역사의 대세가 아니라는 점은 물론이고, 6공체제의 정비과정에서도 내유외강한 지도자의 ‘본때’가 최종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기보다 약체정권의 또다른 흔들림을 보여준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잠시 어지럽히는 소용돌이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직접 휘말린 사람들이 희생되기는 매한가지고 어느 면으로는 더욱 원통하달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원통한 희생자의 무리에 학생·노동자·운동가들뿐 아니라 밀단 경찰들까지 꼽게 되는 지점을 통과했다.
언젠가는 한번 거칠 수밖에 없었던 고비지만 막상 겪은 뒤의 충격은 적지 않다. 이런 때일수록 당국 스스로가 냉정히 반성할 것을 반성하고 푸근하게 베풀 것을 베푸는 것이 그들이 원래 꿈꾸던 ‘대연합’에도 유리할 법하건만, 현상은 정반대인 듯싶다. 이러다가 작은 소용돌이와 소용돌이의 연속이 뜻밖의 크기로 번지고 합쳐져 너나없이 모두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우리는 소용돌이 속에 모두가 빠지는 것 자체에 어떤 희망을 걸지는 않는다. 오직 맑은 정신으로 역사의 큰 물결을 탐으로써만 진정한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소용돌이가 지금보다 좀더 커진대도 과히 겁내지 않는 것은, 민주화와 통일의 흐름이 워낙 압도적이라 설혹 정권까지 휘감는 소용돌이라 해도 ‘너나없이 모두를 집어삼키는’ 규모에는 못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단기적으로는, 비록 광기어린 세력들이 87년 6월투쟁 이래 그 어느 때보다 날뛰고 있지만 아직은 5월이나 6월의 되풀이를 염려할 시점도 기대할 시점도 아니요 이런 고비가 앞으로도 종종 있으리라는 우리 나름의 현실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이번호를 준비하던 올봄의 더러 숨막히는 순간들을 평상심 그대로 보내고자 했다. 또, 그 성과가 지면에 다소나마 나타났기를 바란다. 즉 한쪽에서는 급박한 시국에 너무 한가롭게 나간다는 동지적인 비판도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 친구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색안경의 눈흘김도 받는 가운데, 무언가 내실에 있어서는 우리가 처음부터 내걸었던 뜨거운 동참과 차분한 점검의 작업을 전진시키는 결과였으면 하는 것이다.
이번호는 권두좌담 자리에 「현단계 민족문학의 상황과 쟁점」이라는 지상토론이 대신 들어갔음이 우선 눈에 뜨일 것이다. 기존의 틀을 한번 깨뜨려 보는 의미에서, 그리고 문단 안팎을 막론하고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게 된 쟁점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꾸며본 기획이다. 참가자들은 모두 본지 지면에는 처음 등장하는 새 얼굴이지만 최근의 논의에서 익히 알려졌고 또 각기 중요한 관점을 대표할 만한 쟁쟁한 소장 평론가들이다. ‘창비’의 편집진이 제외된 것도 의도적인데, 이번에는 우리 자신 독자들과 더불어 다양한 시각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자기성찰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며 독자에게도 더 보람있는 지면이 되리라 생각하였다.
지상토론에서 여성 필자가 빠진 것은 우리의 원래 계획에 차질이 온 때문인데, 윤정모·이경자·김향숙·홍희담 들의 작품을 치밀하게 분석한 김영혜씨의 평문 「여성문제의 소설적 형상화」는 그런 아쉬움을 채우고도 남는 바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여성문학론의 이해를 위해서나 우리에게 항상 아쉬운 그냥 ‘좋은 평문’으로서나 주목할 만한 수확이다. 유중하씨의 「주체문예이론의 대중노선에 대하여」와 김성수씨의 「소련에서의 조명희」에 대해서도 우리는 흐뭇함을 느낀다. 전자는 북한문학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중국혁명기의 경험을 일방적 재단이 아닌 비교의 척도로 동원한 역작이며, 후자는 흔히 ‘월북작가’로만 불리어지는 조명희의 다른 일면에 대한 발굴과 비평을 겸한 글이다. 여기에 신간시집들에 대한 조재훈·김진경씨의 서평들과 두 편의 ‘신동엽시인 추모강연’, 그리고 월북작가의 희곡에 대한 안치운씨의 서평과 김대호씨의 민중영화운동 시평이 합쳐, 이번호의 문학·예술 논의는 제법 풍성하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문학작품으로는 시 쪽에 종전보다 많은 지면을 배정했다. 문병란선생이나 김지하·정호승시인은 모두 ‘창비’ 독자에게 낯익은 이름이지만 모처럼 해후하는 반가움이 있을 것이다. 고광현씨의 「판문점에 가서」는 한겨레신문 체육부 기자이기도 한 이 시인의 독특한 체험이 토대가 된 것이며, 작년에 본지로 등단한 김광렬씨가 다시 선을 보였고, 공장노동의 체험을 바탕으로 치열하면서도 상투성에 빠지지 않은 작품을 여러 편 투고해준 신인 서태석씨의 7편을 선정·소개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소설에서는 참신한 새사람을 찾는 일이 이번에 여의치 않았으나 박완서·김춘복 두 분의 단편을 오랜만에 다시 독자에게 선사하게 되어 다행이다. 두 분과 이은식씨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논문으로는 먼저,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국내에도 유명하고 또 우리의 현대사 이해가 냉전의식에서 탈피하는 데 큰 도움을 주어온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특별기고를 얻어낸 것을 자랑해야겠다.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국내 학계의 본격적인 토의가 바야흐로 시작되려는 대목이지만, 역사가로서 그의 성실한 자료조사나 뛰어난 서술솜씨는 이미 정평이 나 있으며 6·25 직전의 유명한 ‘에이치슨 발언’의 수수께끼를 차곡차곡 풀어나간 이번 글에서도 다시 확인될 것이다. 한편 박형준·정관용 두 소장학자들에 의한 한국의 보수야당 연구는 목전의 시사적 관심사를 이 분야의 화술작업에서 아직껏 만나 보기 쉽지 않은 새로운 시각으로 점검한 훌륭한 읽을거리라고 믿는다. 의료보장문제도 ‘정치경제학적’ 관점으로 자상하게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을 지난호를 읽고 처음 알았다는 독자들이 많았는데, 이번호에 김록호씨 글의 후반부를 읽을 때 그야말로 당장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의료보장정책의 실상까지 그런 관점에서 자상하게 조명될 수 있음을 거듭 확인하는 동시에, 사실은 이런 총체적 시각을 가짐으로써만 세부적인 사실들도 제대로 인지될 수 있음을 실감할 것이다. 애초에 분재를 허락한데다 이번호로 밀려온 부분을 정성껏 개고까지 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이상 세 편이 모두 흥미진진하지만 좀 시간을 들여서 읽을 글이라면, 국가보안법에 관한 박원순변호사의 시론이나 본지 고세현부장에 의한 5·18기념 학술토론회의 ‘지상중계’, 중국 및 북한에서의 철학사연구를 다룬 허남진교수의 서평들은 하나같이 큰 부담 없고 짭짤한 읽을거리를 제공하리라 본다. ‘독자의 편지’도 우리로서는 항상 정성을 기울이는 대목이고 우리가 알기에 독자들도 많이 읽어주는 난인데, 앞으로 더욱 많은 분들의 참여가 있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맞춤법에 관해 한마디. 원래 본지는 종전의 맞춤법 통일안과 몇가지 점에서 다른 입장을 견지해왔는데, 지난 3월 1일자로 새로 시행된 한글 맞춤법은 본지의 관행에 훨씬 근접한 것인만큼 우리도 대체로 준수하기로 했다. 다만 몇가지 단서는 있다. 첫째, 이번 맞춤법도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므로 필자 개인이 분명한 소신을 갖고 달리 쓰는 경우는 존중한다는 것이 본지의 변함없는 방침이다. 둘째, 특히 띄어쓰기의 경우는 통일이 요청되는 문법적 측면과 글쓴이의 개성이 반영되는 문체적인 측면이 병존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므로 지나친 획일화를 피할 생각이다. 셋째, ‘외래어 표기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독자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가령 현지음에도 있고 한글표기도 가능한 된소리를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자모만으로 적는다”는 한마디로 배제해버린 규정 따위는 관료주의적 한 표본이라고 보며, 된소리가 거의 없는 영어문화권으로의 편입을 자청하는 처사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창작과비평』1989년 여름호 책머리에
다른 신년칼럼 보기
제목 | 발간일 |
---|---|
한반도정세의 새 국면과 분단체제 | 2024.09.01 |
2024년 새해를 맞으며 | 2024.03.01 |
2023년에 할 일들: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 2023.03.01 |
기후위기와 근대의 이중과제 | 2021.03.01 |
4·15총선, 누구를 어떻게 심판할까 | 2020.04.01 |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 2019.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