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창비 책머리에] 전환기의 세계와 ‘창비’의 새 단계

인간의 역사에서 전환기가 아닌 시기가 있었을까마는, 창간 25주년 기념호를 내는 우리에게는 이 흔해터진 낱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통권 100호에 훨씬 못 미치는 25주년이라서 감회는 오히려 깊다. 더구나 20주년에 해당하던 1986년 이맘때는 잡지도 없고 출판사마저 잠시 없어진 데다 우리의 민족문학과 민족민주운동 전체가 5공정권과의 처절한 결전을 앞둔 시기였기에, 지금과는 안팎의 사정 모두가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87년의 유월항쟁으로 이른바 제5공화국이 붕괴하고 89년 이래 동서냉전 체제가 와해되었다고 하지만, 낡은 세상의 위세는 물론 아직껏 만만찮다. 무엇보다도 ‘걸프전쟁’의 이름으로 요즘 한창 세인의 이목을 끌고 있는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 좋은 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 자체가 새세상의 공도(公道)와 거리가 먼 작태였는데, 그 잘못을 바로잡는답시고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열 배도 넘는 폭발물을 제3세계의 한구석에 쏟아부으면서 팔레스타인이나 파나마, 그레나다 문제 따위는 거론도 말자는 초강대국의 작태를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미국 대통령 자신은 이것이 단순히 ‘쿠웨이트 해방’ 차원이 아닌, 미국 주도하의 ‘새로운 국제질서’ 창출 문제임을 공언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냉전시대 이후에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최첨단무기를 동원한 대량살상과 대량파괴를―적어도 상대가 제3세계 국가요 인종인 경우에는―조금도 개의치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대부분 언론은 우리 자신이 제3세계요 유색인종인 것도 잊어버린 듯, 최첨단 전자기기와 천연색사진에다 도안사들까지 동원해서 미군의 전과와 신형 무기의 성능을 광고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때를 만난 5공·6공 세력은 하산이다 파병이다, 구속이다 해고다 하며 민주화 대세의 역전에 총력을 모으고 있다. 심지어 바로 5공과 6공 아래서 짓물러 터진 이 사회 도덕성의 전반적 위기 증상조차도 자산들의 정략에 이용해볼까 해서 눈빛이 남다르다.

하지만 25주년의 자축 분위기에 취해서가 아니라, 어쨌든 세상은 20주년 당시에 비해 엄청나게 달라졌고 돌이킬 수 없이 달라졌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페르시아만의 전쟁만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전쟁 및 베트남전쟁과 유사한 면들이 차츰 지적되고 있고 이는 마땅히 더욱 철저하게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눈에 띄는 몇가지 차이점도 결코 사소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한국전쟁은 국제연합의 명백한 결의에 따라 ‘유엔군’의 깃발 아래 수행되었는데, 이번의 대이라크전쟁은 안전보장이사회의 모호한 결의문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해석한 끝에 ‘다국적군’이라는 엉성한 존재를 낳았다. 더욱이 베트남전에서는 미국 돈으로 외국 군인들을 구해다 부렸는데 지금은 미국인들이 싸우는 값을 아랍세계의 왕들과 2차대전의 패전국인 일본·독일 그리고 심지어 남한에게서조차 걷어가는 형국이니, 패권국가의 위상에 적잖은 변화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소련의 약화로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축복만은 아니다. ‘반공성전’ 명분의 소멸로 부자와 강자 행세가 더욱 적나라해졌으니, 이런 등등의 이유로 베트남전이나 한국전 같은 장기전은 애당초 감당할 생각을 못하고 속전속결을 위한 온갖 무리수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워낙 파괴력이 엄청난만큼 그러고도 승리할 수는 있겠지만, 길게 보아 미국 자체의 약화와 아랍 민중의 반미자주화 추세 강화라는 쓴 잔이 기다리고 있음은 의심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누가 무어라 하건 전면적인 ‘5공회귀’는 없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소신이다. 6공의 주체세력 자체가 5공세력과 그다지 달라서가 아니라, 저들을 둘러싼 세상이 달라지고 저들이 상대하는 민중이 옛날 같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들 스스로가 이 점을 모를 만큼 무지한 것도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본질 불변’ 운운하는 수사법에 스스로 얽매이지 말고, 정확히 어떤 차원에 그 불변의 본질이 있으며 어떤 차원에서는 실제로 변했고 또 변환자재한가를 정확히 알아서 대응해가야 할 것이다.

25주년을 기념하는 자체 수련회 겸 토론회를 마련하면서 우리가 특히 염두에 둔 것도 그런 점이었다. 즉 우리 나름으로 변함없이 고수할 것과 과감하게 전환할 것을 점검해보고자 했다. 그때의 토론과정을 녹음해서 정리해놓은 것이 이번 기념호의 ‘특집 I’이다. 제1주제 「우리 민족·변혁운동론의 어제와 오늘」, 제2주제 「90년대 민족문학의 과제」에 대해 강만길·백낙청씨가 각기 발제했고, 저녁식사 때와 토론 중간에 잠깐 한번씩 쉰 것 말고는 오후 2시부터 11시 넘어까지 열띤 토의가 진행되었다. 그러고도 미진한 느낌은 우리 자신들에게도 남았고 실제로 새벽녘까지 논란을 계속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 열기가 지면을 통해서나마 독자들에게 전달되기 바라며, 해당 주제들에 관해 다소 새로운 이야기도 나왔으리라 믿는다.

독자에 대한 사은을 겸해 한껏 두툼하게 만든 이번호의 또 한가지 특집은 시인 33인선이다. 평소 한정된 지면으로 특히 시단의 폭발적인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 점을 보완할 겸, 풍성한 잔치 기분을 이런 식으로 내어본 것이다. 고은씨 등 그전에도 자주 지면을 빛내주신 분들과 황동규씨처럼 『창비』의 시란에 처음 기고하시는 분들, 그리고 서울과 지방의 신예들에 이르기까지 되도록 다양한 구성을 꾀했다. 박노해·백무산씨 등 몇 분이 그쪽 사정으로 청탁에 응하지 못한 바도 있고 우리의 불찰로 간과된 분도 많겠지만, 이만한 잔칫상을 마련토록 해주신 여라 시인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를 계기로 시분야에서도 더욱 다양하고 수준높은 지면을 만들도록 노력할 것을 독자들께 약속드린다.

소설로는 비슷한 특집을 만든다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대신 김학철·이호철·이문구씨 등 원로·중진들로부터 김영현·김한수·김하기씨 등 신예에 이르는 21인의 신작단편을 모은 기념소설집 『우정 반세기』를 기념호와 동시에 발간한다. 본지의 모든 독자들께 별책부록으로 배포하지 못함이 유감스러우나, 우리 나름으로는 또하나의 선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물심양면의 정성을 쏟은 책이며 또 그만한 성과가 나왔다고 자부한다. 자연히 본지 자체에는 단편이 하나도 안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호에 이어지는 윤정모씨의 장편 『들』이 점입가경이라 독자들의 아쉬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문학평론 분야에서는 도정일 교수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과 하정일씨의 일제하 사회주의 리얼리즘론 논의가 둘다 특집 토론과 직결되는 동시에 본지의 일관된 관심에도 부합하는 무게있는 글들이다. (두 분의 ‘독자의 편지’가 지난호는 물론 이번호 문학논의를 이으면서 일정한 비판과 보완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게다가 이번에 시 특집에의 참여를 사양해가며 고정 서평자의 몫을 다해준 신경림 시인의 「자기탐구의 시, 노래가 있는 시」도 그만이 쓸 수 있는 값진 평론이 아닌가 한다. 소설집 『완전한 만남』과 보고문학 『조국』에 대한 신승엽씨의 서평 역시 뼈있는 비평문으로서, 기념토론 제2주제의 논의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결과가 되었다. 나머지 두 서평의 대상도 문학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이소선 여사의 『어머니의 길』과 소설가 김성동씨 등의 불교관계 저서를 문민영씨와 지명스님이 각기 다루었는데, 잡다하지 않되 다양한 서평란을 꾸미려는 우리 노력의 부분적 결실이다.

기념토론회에서 본격적으로 논하지는 못했지만 사회주의권의 변화와 뻬레스뜨로이까의 진행에 대한 관심은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관심을 공유한 만큼 인식도 공유하려면 아직 멀었고, 더구나 소련 및 동유럽 사회들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더불어 그곳 지식인과 민중의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무지도 뒤섞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일찍부터 소련의 기성체제를 비판해온 까갈리쯔끼의 말을 독자가 직접 들을 기회가 생긴 것은 뜻깊은 일이다. 그는 뻬레스뜨로이까 이후로 혼란과 방황이 오히려 심해진 현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과 더불어, ‘현존사회주의’에 대한 반발로 재자본주의화에 턱없는 기대를 걸고 있는 소위 급진파의 본질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물론 까갈리쯔끼의 음성 역시 여러 목소라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가 맹신할 대상은 아니다. 진지한 공부거리가 하나 더 주어진 것으로 감사할 일이며, 똑같은 뜻에서 손호철씨의 「뻬레스뜨로이까의 제3세계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시 우리의 고마움에 값할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의 필자와 함께, 지난날의 교조적인 자본주의위기론·제3세계혁명론 들에 대한 고르바초프시대의 진지한 비판을 사주면서도, 바로 그렇게 비판받은 교조주의의 반사적 유물이랄 수 있는 여러가지 이론적 혼란은 그것대로 짚고 넘어가야 마땅하리라고 믿는다. 더욱 활발한 토론의 한 계기가 되기 바란다.

지면제한도 있어 계급론 연속기획은 쉬고 여름호에 재개될 것이다. 다만 미술평론가 유홍준씨의 문화시평이나 남북고위급회담을 다룬 윤석인씨의 시론, 현기영씨의 만해문학상 수상연설 등은 굵직한 기획이 많고 잡지가 두꺼워졌을수록 독자들께 환영받는 읽을거리가 되리라 본다.

언급하는 순서가 뒤바뀌었지만 기념호의 권두를 장식하기 위해 ‘창간 25주년에 말한다’는 제목 아래 열두 분의 글을 받았다. 축하의 말씀이 포함된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로서는 덕담 이상의 내용을 주문드렸고 모두가 그 뜻에 응해주셨다. 독자들에게도 ‘창비’의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계기가 되려니와, 특히 우리 자신은 진지한 자기성찰과 또 한번의 자기갱신을 위한 토론자료로 삼으려 한다. 말씀해주신 여러 분들, 특히 병석에서 구술하여 보내주신 요산 김정한 선생을 비롯한 여러 어른들의 격려에 흐뭇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두번째 4반세기가 진정 새로운 비약의 단계가 되게끔 이 분들과 다른 수많은 애독자들의 문제제기를 음미하고 취사하려는 것이다. 함께 싣는 본지 편집위원 백영서씨의 「미국에서 보낸 편지」는 그러한 문제제기의 하나이자 진행 중인 내부토론의 일부도 되는 셈이다. 그리고 25주년 행사들이 끝난 뒤 더욱 본격화될 우리의 진용정비와 자기쇄신의 열매는 무엇보다도 본지 지면과 본사의 출판물을 통해 나타날 것이다.

기념행사 중 지난번 토론회가 일종의 ‘엠티’였던 데 반해, 이번호와 기념 소설집 발간 직후 우리는 2월 20일 저녁 송현클럽에서 공개행사로 조촐한 자축연을 갖고자 하며, 뒤이어 (이번호 148면에 광고된 대로) 광주·대구·부산에서 문학강연회를 열 계획이다. 특히 지방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기대하면서, 앞으로는 다른 고장의 독자들과도 만날 기회를 구상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창작과비평』1991년 봄호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