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창비 책머리에] 해방 50년, 분단 50년, 그리고 창비 29주년

1995년의 첫 호는 본지의 창간 29주년 기념호가 된다. 하지만 8·15 해방과 38선 획정의 50주년 되는 해의 서두라는 의미가 아무래도 더 크다. 기념호의 특집도 당연히 거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집 제목을 ‘세계 속의 분단 50년, 그 후의 과제’라 붙인 것이 분단만 보고 해방의 측면을 무시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간결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의 실천적 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분단’을 택했다. 동시에 분단과 통일의 세계사적 의미를 생각해온 우리의 일관된 자세에 따라 ‘세계 속의 분단’을 내세운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번 특집에 꽤나 정성을 쏟았고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믿는다. 첫 번째 필자 강만길교수는 알려진 대로 1970년대 중반에 ‘분단시대’의 개념을 처음 제시하면서 줄곧 ‘분단국가주의’를 넘어서서 ‘통일민족주의’로 나아가는 역사인식을 강조해왔다. 애초의 문제제기로부터 어느덧 스무 해가 넘은 오늘의 시점에서 지난 50년의 역사적 경과와 그간의 논의들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일관된 주장을 평이한 문장으로 정리해준 이번 글이 많은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리라 믿는다. 물론 분단국가주의와 통일민족주의의 교묘한 결합이 오늘날 분단체계 재생산의 가장 효과적인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했다고 볼 때, 그 결합을 분단체제의 극복 쪽으로 돌리는 작업이 독자들 모두의 몫으로 안겨지기도 한다.

특집에 맞춰 일부러 새 글을 집필해준 일본의 와다 하루끼,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 두 분은 모두 우리 민족과 본지에 남다른 애정을 지닌 외국인으로 본지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각기 전문지식과 특별한 관심사를 중심으로 쓴 두 글에 나타나는 상황의식의 유사성도 흥미롭거니와, 그동안 본지 지면에서 여러 국낸 논자들이 제기해온 문제가 좀 더 넓다면 넓은 시각에서 그 의의가 재확인되는 것이 무엇보다 반갑다. 가령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에 관한 와다교수의 모색은 그동안 본지가 동아시아 문제에 기울여온 노력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역내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도 한반도 분단의 슬기로운 극복이 결정적임을 확인해준다. 더욱이, ‘대동아공영권’과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협동관계가 진행될 때 “종합적으로 전체를 총괄해가는 것은 조선민족이 아니겠는가”라는 발언은, 따지고 보면 당연한 상식인데도 한국인의 입에서 나오면 민족적 열등감의 보상심리로 오해받거나 실제로 그런 심리의 표현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와다교수의 이성적 분석은 허황된 자만심을 부추기기보다 오히려 무거운 책임감으로 우리를 숙연케 만드는 바 있다.

시야를 더욱 확대하여 ‘오늘의 세계정치’에 대한 조감에서 출발하는 커밍스교수 역시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 지니는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우리들의 신념을 뒷받침해준다. 동서냉전의 종결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남북의 대결상태가 오늘날 세계가 맞닥뜨린 문제의 원만한 해결에 얼마나 큰 장애가 되는지를 설파하는 동시에, 한국전쟁 연구의 대가답게 이 전쟁이 세계사적으로 베트남전쟁보다 훨씬 중요한 전쟁이었음을 논증함으로써 거기서 결과된 분단체제의 해소가 미국 자체의 개혁과도 어떻게 맞물려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의 독자로서는 다시 한번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서, 정부간 관계가 아닌 양국민의 참된 연대라는 것이 어떤 현실적 근거를 지니는 말인지를 실감케 된다.

외국인은 아니지만 송두율교수 역시 멀리 베를린에서 본지를 위해 특별히 글을 보내주었다. 철학자로서 그가 제기하는 ‘인식론적 접근’은, 우리의 진보적 운동권에서 아직도 운동의 ‘주체’와 ‘대상’을 너무 고지식하게 설정하곤 하는 습성이 실천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낳고 있음을 볼 때 현실적으로도 절실한 문제제기임이 분명하다. 동시에 이런 논의는 그동안 북한방문 이력과 적극적인 남북화해촉구 발언 등으로 곧잘 오해를 사기도 했던 송교수의 입장이 북쪽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다른 철학임을 확인하는 계기도 되지 않을까 싶다. 결론에서 그는 하버마스의 ‘간주관성’ 개념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제의하는데, 예컨대 남한의 실천운동에서도 운동의 주체를 세계체제의 일부로, 분단체제의 절반으로, 그리고 남한사회의 다수 민중으로, 각기 다르게 설정하되 그 어느 하나로 한정짓지 않는 발상과의 연결가능성 여부를 점검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논문의 필진에 소장층이 빠진 대신 좌담은 비교적 젊은 분들로 구성해보았다. 그리고 모두 학계 인사들인만큼 이론적인 점검에 치중키로 했다. 그러나 ‘근대성의 재조명과 분단체제 극복의 길’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어디까지나 ‘이후의 과제’를 염두에 둔 이론적 점검인데, 근대성이나 분단체제론 외에도 포스트모더니즘론, 세계체제론, 새로운 학문방법론 등 수많은 문제를 다루면서 지나친 난삽이나 중구난방의 혼란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참석자 모두가 일정한 실천적 의지를 공유했기 때문이겠다. 또한 그동안 본지를 통해 제기된 문제들을 점검한다는 데 국한한다는 기획 의도가 적어도 본지의 열성적 독자들에게는 반가운 친절로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원래 이 특집에는 나도 문학 분야를 맡아 한 몫 거들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위악을 하고 말았으니 본지가 제기해온 문제 중 민족문학론에 관한 점검이 빠진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며, 그밖에 나 자신이 이런저런 발의에 관해 특집의 논의가 더러 미흡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어도 누구를 탓할 처지가 아니다. 그나마 좌담자들이 분단체제론을 진지하게 비판하며 각기 다른 관점에서 옹호하기조차 했고 논문 중에도 더러 언급되었다는 사실이 고마울 따름이다. 다만 스스로 할 일을 다 못해낸 자책감에서, 편집자의 머리말로는 다소 파격이요 어쩌면 범칙일지 모를 논평을 더러 끼워 넣기도 하였다.

나 개인의 태만에도 불구하고 이번호의 문학평론은 결코 초라하지 않게 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염무웅선생이 오랜만에 본격적인 작품평을 기고해주었다. 시에 관해서는 오래 전부터 중견 이상의 시인이 3,4회에 걸쳐 신간시집들을 평해주는 자리를 마련해왔는데, 소설 쪽에서는 워낙 읽을 분량도 방대하고 관록있는 평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아 비슷한 기획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염선생이 ‘계간소설평’을 일년간 담당하는 노고를 수락한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인데, 실제로 서낸 자상한 작품평들을 읽을 때 일반 독자가 즐거움을 느낌은 물론, 평단의 동료·후진들로서는 무언의 채찍질을 받는 바도 없지 않을 듯하다.

염무웅씨의 계간평 외에도 윤지관, 권성우 두 분의 평론이 모두 진지한 논쟁을 포함하는 비평의 기능에 충실한 글이고, 시집 서평의 고정 필자로는 이번호부터 조태일시인이 그의 무수한 산문의 맛을 오랜만에 다시 보여줄 것이다. 노벨상 작가 오오에 켄자부로오의 작품세계를 다룬 서은혜교수의 글 등이 풍요를 더하는데, 아울러 반드시 일독을 권하고 싶은 글이 번역으로 소개되는 프랑꼬 모레띠의 독창적인 근대유럽문학론이다. 중세말 이래 6백년의 유럽문학을 한눈에 훑어본 놀라운 박학과 솜씨의 산물이기도 하다.

작품으로도 신경림선생을 비롯한 여섯 분의 시인과 이동하, 유시춘 두 분 소설가가 청탁에 응해주었고 신인 작가 한 사람을 배출하는 기쁨마저 갖게 되었다. 박현씨의 단편 「달은 결코 도자기처럼 부서지지 않는다」는 자칫 무협소설의 어설픈 모방으로 오인될 수도 있으나, 실은 무협지적 공상에 대한 풍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공상적 기제에 적절히 편승하기도 하는 교묘한 줄타기를 진행하면서 이를 우리 사회의 현재적 관심사로 끌고 오는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준다. 늦깎이로 등단하는 이 작가의 왕성한 활약을 기대한다.

그밖에 인동 영화 「밴디트 퀸」에 대한 흥미진진한 논평과 ‘영화 1백년’을 맞은 영화현실에 대한 성찰을 함께 써준 안정숙씨, 그리고 미처 거명 못한 서평·촌평의 필자들께도 두루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본사는 계간지 창간 29주년을 맞이한 새해에 독서교양지 『창비문화』를 창간하는 등 독자들의 여망과 시대의 요구에 부응코자 계속 힘쓰고 있음을 알리며, 변함없는 성원과 편달을 바란다.

 

『창작과비평』1995년 봄호 책머리에